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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상순 시인 / 몽환시(夢幻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8.

오상순 시인 / 몽환시(夢幻詩)

 

 

다섯자 육괴(肉塊) 속에

육(肉)의 피는 끓고

영(靈)의 불꽃은 탄다

 

고통(苦痛)과 번뇌(煩惱)를 못 견디는 `나'

대령(大靈)의 무형(無形)한 공기(空氣) 펌프를 빌어

전신(全身)의 피를 모두 다

뽑아 짜내어

투명순백(透明純白)한 옥화병(玉花甁) 속에 넣어

쇠마개로 봉(封)하여

공중(空中)에 매단다.

 

영(靈)의 불꽃은 여전(如前)히

맹렬(猛烈)한 기세(氣勢)로 공중(空中)으로 타오른다

무슨 원수나 갚으려는 듯이……

독사(毒蛇)의 혀 같은 그 혀로

옥화병(玉花甁)을 핥는다.

병(甁)속의 피가 기름같이 끓더니

봉(封)한 쇠마개가 녹아 흘러내려

피에 섞어서 한참

바글바글 끓더니

보라!

그― 병구(甁口)에 무슨 꽃 모양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아아, 절미방순(絶美芳醇)한

백합화(百合花) 한 송이

우주창조시대(宇宙創造時代)에

파라다이스 동산에 피었던 그것 같은―-

또 보라!

불꽃의 춤과 탐이 심(深)하면 심(深)할수록

그 백합화(百合花)는

맹렬(猛烈)하고 아름다운 불꽃의

춤과 곡(曲)을 따라 공(空)에 떠 올라서는

간 곳 없이 자취 없이 사라지고

사라진 자국에서 그 모양 같은

다른 백합화(百合花)가 또 피어 오른다.

불꽃의 가는 노래의 조자(調子)를 따라

붓 뚜껑에

비눗물 묻혀 불 때에 되는 모양으로

수없이

피어 오르곤 사라지고

사라지곤 피어 오르고……

아아, 그리고 또 보라!

사라져 가는 그― 백합화(百合花) 속에

나의 이메지[像]가

레테르 같이 몽환(夢幻)처럼 나타난다

아아,

나의 혼(魂)도 의식(意識)도 꽃속의 나의 이메지로

옮겨가는 듯하던 순간(瞬間)

내가 꽃 속에서 꿈같은 가운데

희미하게 아래를 내려다 보니

피와 불꽃의 싸움에

못 견디던 나의 육괴(肉塊)는

흙빛처럼 까맣게 타서

그 꽃에 빗겨 누웠다!

 

타오르는 불꽃의 춤을 따라

피는 순간(瞬間)에 사라져 가는 백합화(百合花)의

애달픈 노래

웃는 가슴에 싸여

수(數)없이 공중(空中)에 사라져가는 흔적(痕迹)도 없이

나의 이메지!

꿈?

 

………………

 

환멸(幻滅)의 미(美)?

 

………………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시인 / 미로(迷路)

 

 

미록의 낙원(樂園)

애(愛)와 역(力)의 유우토피아

평화(平和)의 서기(瑞氣) 서린

불로초(不老草) 동산에 난데없이

이리[狼]가 들었다

사나운 바람 일고

검은 구름 동(動)하던

하룻밤에.

 

평화(平和)의 무리들은

암흑(暗黑) 속에 흩어졌다

사면팔방(四面八方)으로

공포(恐怖)와 원한(怨恨)과 맹목중(盲目中)에―-

 

그때 어린 사슴 한 마리

길을 여의고

사막(沙漠)으로 뛰어 들었다

불의(不意)의 실락(失樂)이여

그에게는

엎드러지며 빠지며

무서운 방황(彷徨)이 비롯되었다.

 

아― 그는

풀도 없고 샘도 없는

불 같은 열(熱)의

끝없는 모래바다에 선

자기(自己)를 발견(發見)했다

저편 모래바다 수평선(水平線) 위에

붉은 해 솟아올 제

 

미친 듯 그는 울부짖었다

아― 그러나 메아리도 없는

절망(絶望)이여! 불안(不安)이여!

모든 것은 이미 끝나고 있었다……

속절없이 운명(運命)의 길을 그는

계속하는 수 밖에 없었다.

 

사막(沙漠)에도

무심(無心)한 밤이 오고 날이 새고

날이 가고 밤이 오기를

여러 번 거듭했다.

 

뜨거운 모래에 빠지는

발자욱에는

적혈(赤血)이 고였다

전신(全身)에선 땀이 흘렀다.

 

최후(最後)의 충동(衝動)으로

번쩍이던 그의 눈에

풀과 물의 형적(形跡)이

희미하게 비치었다

저―편 하늘과 모래바다가

맞닿은 곳에―-

오, 그것은 오아시스였다.

 

힘! 최후(最後)의 힘을 다하여

거기로 단번에 뛰어가고자

발버둥쳤다

아, 그러나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입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

……그 순간(瞬間)

단말마(斷末魔)의 그 순간(瞬間)이었다

미로전(迷路前)의 불로초(不老草) 동산의

비지언[幻想]이 전개(展開)되어

몽롱(朦朧)한 눈에 비치었다.

 

그곳에는 여전(如前)하게

자기(自己) 동무들은

불로초(不老草)를 뜯어 먹고 있었다

이 운명(運命)의 벗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불로초(不老草)의 상징(象徵)

힘의 자현(自現)이던

젊은 사슴의

최후(最後)의 숨은 끊어졌다

그 환영(幻影)이 사라지는

같은 순간(瞬間)에…….

 

이리 하여란

이상(異常)한 운명(運命)의

사막(沙漠)의 비극(悲劇)은

미해결(未解決) 그대로 영원(永遠)히

최후(最後)의 막(幕)이 떨어졌다.

 

오, 끝없는 사막(沙漠)에

태양(太陽)은 꺼지다

어둠의 베일이

미로(迷路)의 어린 사슴의

시체(屍體)를 덮도다

고요히 말없이…….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吳相淳, 1894.8.9 ~ 1963.6.3] 시인

1894년 서울에서 출생. 호는 공초(空超). .1906년 경신 학교(儆新學校) 졸업. 1918년 도시샤(同志社) 대학 종교철학과 졸업. 1920년 김억(金億), 남궁벽(南宮壁),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 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폐허》의 동인으로 그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24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 중앙 학림(동국 대학교의 전신) 교수 역임.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과 대통령상 등을 수상. 1963년 지병으로 사망. 주요작품으로 「한잔술」, 「첫날밤」, 「방랑의 마음」,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낙엽」 등이 다수 있음. 저서로는 死後 발간된  《오상순 시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