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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병기 시인 / 수선화(山仙花)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9.

이병기 시인 / 수선화(山仙花)

 

 

풍지(風紙)에 바람 일고 구들은 얼음이다

조그만 책상 하나 무릎 앞에 놓아 두고

그 우엔 한두 숭어리 피어나는 수선화(山仙花)

 

투술한 전복 껍질 발 달아 등에 대고

따듯한 볕을 지고 누워 있는 해형수선(蟹形水仙)

서리고 잠들던 잎도 굽이굽이 펴이네

 

등(燈)에 비친 모양 더욱이 연연하다

웃으며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숭이숭이

하이얀 장지문 우에 그리나니 수묵화(水墨畵)를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39

 

 


 

 

이병기 시인 / 시마(詩魔)

 

 

그 넓고 넓은 속이 유달리 으스름하고

한낱 반딧불처럼 밝았다 꺼졌다 하여

성급한 그의 모양을 찾아 내기 어렵다

 

펴 든 책(冊) 도로 덮고 들은 붓 더져 두고

말없이 홀로 앉아 그 한낮을 다 보내고

이 밤도 그를 끌리어 곤한 잠을 잊는다

 

기쁘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

이생의 영과 욕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오로지 그 하나만은 어이할 수 없고나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애도(哀悼)

 

 

비록 병이 들어 앓는다고 다 이러랴

백 년도 하찮은데 앞을 서서 가느냐

네 간 곳 내 가기 전에 이 설움을 어이리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야시(夜市)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갓쓴 이 벙거지쓴 이 쪽진 이 깎은 이 어중이 떠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기정기 흥성스럽게 오락가락한다 높드란 간판 달은 납작한 기와집 퀘퀘히 쌓인 먼지 속에 묵은 갓망건 족두리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 썩은 비웃 쩌른 굴비 무른 굴비 무른 과일 시든 푸성귀붙이 십전 이십전 싸구려 싸구려 부르나니 밤이 깊도록 목이 메이도록

 

저 남산 골목에 우뚝우뚝 솟은 새 집들을 보라 몇해 전 조고마한 가게들 아니더냐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 그나마 찬바람만 나면 군밤 장사로 옮기려 하느냐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李秉岐) 시인 / 1891∼1968

호: 가람(伽藍). 시조 시인. 국문학자. 전북 익산에서 출생. 1913년에 관립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전념하였다.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의 시조로 침체된 시조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을 거쳐 1935년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었고, 그 후에<가람 시조집>을 발표, 자연의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42년에는<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다가 석방된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백철과 공저

로 <국문학 전사>를 간행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시에 압도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고, 저서에는 <국문학 개론> <가람 문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