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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상순 시인 / 바다물은 달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9.

오상순 시인 / 바다물은 달다

부제: `전쟁(戰爭)과 자유사상(自由思想)'의 출현(出現)을 축(祝)하면서

 

 

한강(漢江)의 밑바닥이

거의 환히 드려다보인다고

백성(百姓)들은 수군거리며

심각(深刻)한 불안(不安)과 공포(恐怖)에 떨고

전답(田畓)은 마르고 지각(地殼)은 갈라지고

창천(蒼天)도 갈라질 듯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마르고

뭇 생물(生物)과 동물(動物)과 인간(人間)이

운명(運命)의 엄엄(奄奄)함이여…….

 

강(江)가의 일망무제(一望無際)한 백사장(白沙場)

그 모래알들은 낱낱이 알알이

거의 그 발화점(發火點)― 그 초점(焦點)에 달(達)할 직전(直前)의 순간(瞬間)인 듯

이글이글 끓을 듯 속속의 콩알 튀듯 튈 듯한 가운데

억조창생(億兆蒼生)의 운명(運命)의 사막(沙漠)을 예감(豫感)하면서

나는 암담(暗澹)한 운명(運命)의 그림자를 밟으며

목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리고 피의 학갈을 느끼면서

맥(脈)없이 풀이 죽어 그 위를 헤매며 거니는데

오― 보라! 눈을 부릅뜨고 보라!

무서운 사막(沙漠) 속의 기적(奇蹟)의 오아시스를.

 

난데없이,

억만년(億萬年)의 태고색(太古色) 창연(蒼然)한 거대(巨大)한 암석(巖石)의 돌학(돌함)이

돌출(突出)하자

보라! 다시 눈을 부릅뜨고

희다 못해 푸르고 속모를 청열(淸列)한 물더미

그 무한량(無限量)의 물더미의 샘고아 힘차게 터져

용솟음치며 절대도(絶對度)로

힘차게 솟아 넘쳐 흐름을…….

 

한(限)없이 샘솟는 이 수원(水源)은 실(實)로 창망(滄茫)한 동해(東海)바다로 직통(直通)하였음을

아니! 태초(太初) 혼돈(混沌)에서 하늘과 땅이 나뉘고 하늘과 바다가 갈라지던

그 태고겁초(太古劫初)의 창조(創造)의 바다 속에 뿌리 박았음을

나는 직관(直觀)하고 영감(靈感)했건만

물맛은 짜지가 않고 감로(甘露)같이 달았다

이 생명수(生命水)와도 같은 거룩한 샘물이 망막무제(茫漠無際)한

사막(沙漠)과 대지(大地)를 골고루 적시고 스며들어

전체(全體)를 녹화(綠化)하고 소생(蘇生)하여 꽃피고 열매 맺을

참 평화(平和)의 명일(明日)을 예감(豫感)코

무한(無限)한 환희(歡喜)와 감사(感謝)와 법열(法悅)에 넘치며 잠기며

무심(無心)코 용(勇)을 써 몸을 뒤치는 찰나(刹那)

깨고 보니 꿈일러라.

 

한(限)없이 좋고 든든하고도 서글프고 안타까운 꿈일러라

그러나 이것은 역시(亦是) 꿈이 아니더라

꿈이 꿈이 아니더라

꿈이 꿈인 채 그대로 꿈이 아니더라.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시인 / 방랑(放浪)의 마음 2

 

 

나그네의 마음

오― 영원(永遠)한 방랑(放浪)에의

나그네의 마음

방랑(放浪)의 품 속에

깃들인 나의 마음

 

나는 우다

모든 것이 다 있는 그 세계(世界) 보고

나는 우다

모든 것이 다 없는 그 세계(世界) 보고

나는 우다

한(限)없는 그 세계(世界) 보고

나는 우다

한(限) 있는 그 세계(世界) 보고

나는 우다

유(有)와 무(無)가 교차(交叉)하여 돌아가는 그 세계(世界) 보고

나는 우다

생(生)과 사(死)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그 세계(世界) 보고

나는 우다

나의 육(肉)의 발이 밑 있는 세계(世界)에 닿을 때

 

나는 우다

나의 영(靈)의 발이 밑 없는 세계(世界)에 스쳐 헤매일 때

나는 우다

오― 밑 없고도 알 수 없는 웃음

나는 우다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吳相淳, 1894.8.9 ~ 1963.6.3] 시인

1894년 서울에서 출생. 호는 공초(空超). .1906년 경신 학교(儆新學校) 졸업. 1918년 도시샤(同志社) 대학 종교철학과 졸업. 1920년 김억(金億), 남궁벽(南宮壁),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 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폐허》의 동인으로 그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24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 중앙 학림(동국 대학교의 전신) 교수 역임.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과 대통령상 등을 수상. 1963년 지병으로 사망. 주요작품으로 「한잔술」, 「첫날밤」, 「방랑의 마음」,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낙엽」 등이 다수 있음. 저서로는 死後 발간된  《오상순 시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