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시인 / 수선화(山仙花)
풍지(風紙)에 바람 일고 구들은 얼음이다 조그만 책상 하나 무릎 앞에 놓아 두고 그 우엔 한두 숭어리 피어나는 수선화(山仙花)
투술한 전복 껍질 발 달아 등에 대고 따듯한 볕을 지고 누워 있는 해형수선(蟹形水仙) 서리고 잠들던 잎도 굽이굽이 펴이네
등(燈)에 비친 모양 더욱이 연연하다 웃으며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숭이숭이 하이얀 장지문 우에 그리나니 수묵화(水墨畵)를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39
이병기 시인 / 시마(詩魔)
그 넓고 넓은 속이 유달리 으스름하고 한낱 반딧불처럼 밝았다 꺼졌다 하여 성급한 그의 모양을 찾아 내기 어렵다
펴 든 책(冊) 도로 덮고 들은 붓 더져 두고 말없이 홀로 앉아 그 한낮을 다 보내고 이 밤도 그를 끌리어 곤한 잠을 잊는다
기쁘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 이생의 영과 욕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오로지 그 하나만은 어이할 수 없고나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애도(哀悼)
비록 병이 들어 앓는다고 다 이러랴 백 년도 하찮은데 앞을 서서 가느냐 네 간 곳 내 가기 전에 이 설움을 어이리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야시(夜市)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갓쓴 이 벙거지쓴 이 쪽진 이 깎은 이 어중이 떠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기정기 흥성스럽게 오락가락한다 높드란 간판 달은 납작한 기와집 퀘퀘히 쌓인 먼지 속에 묵은 갓망건 족두리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 썩은 비웃 쩌른 굴비 무른 굴비 무른 과일 시든 푸성귀붙이 십전 이십전 싸구려 싸구려 부르나니 밤이 깊도록 목이 메이도록
저 남산 골목에 우뚝우뚝 솟은 새 집들을 보라 몇해 전 조고마한 가게들 아니더냐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 그나마 찬바람만 나면 군밤 장사로 옮기려 하느냐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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