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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목월 시인 / 사투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9.

박목월 시인 / 사투리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런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샛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런 것은

나무나 하늘이나 꽃이기보다

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

 

참말로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 냄새가 난다.

약간 이슬 냄새가 난다.

그리고 입 안이 마르는

황토 흙 타는 냄새가 난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산(山)․소묘 1

 

 

한 자락은 햇빛에 빛났다. 다른 자락은 그늘에 묻힌 채…… 이 길씀한 산(山)자락에 은은한 웃음과 그윽한 눈물을 눈동자에 모으고 아아 당신은 영원한 모성.

 

그의 음양의 따뜻한 회임(懷姙) 안에 나는 눈을 뜨고 감았다. 다만 한 오리 안개가 그의 신비를 살픈 가리고 있었다. 어머니라는 말씀이 풀리지 않게 또한 굳지 않게.

 

*

 

선녀는 늘 승천했다. 우의(羽衣) 한 자락이 하얗게 빛났다. 또 한 자락은 어둠에 젖은 채…… 어둠에 젖은 채 선녀는 또한 늘 하강했다.

 

초록빛 깊은 하늘에는 은두레박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산(山)․소묘 2

 

 

갈기가 휘날렸다. 말발굽 아래 가로 눕는 이슬밭. 패랭이 꽃빛으로 돈다. 무지개가 감기고 풀리고 하얗게 끓는 질주. 태고의 아침을, 창조의 숨가쁜 시간을. 출렁거리는 생명. 마악 눈을 뜬, 더운 피가 금시에 돈, 그것의 질주. 달리는 그것으로 달리게 되고, 달리게 하는 그것으로 달리게 하는 말굽 아래 척척 가로눕는 구름. 새로 빚은 구름 엉키고 풀리고 휘휘 도는 무지개…… 달리는 것 옆에서 달리는 것이 목덜미를 물고, 출렁거리는 엉덩이, 불을 뿜는 입, 생명의 고동을. 비등을. 뿜는 숨결, 끓는 박자. 발굽의 말발굽의 날개를……

 

팍 앞무릎이 꼬꾸라진 채

영영

산(山)이 된.

 

산(山) 위에 은은한 천개(天蓋).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산(山)․소묘 3

 

 

산(山)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바다에서 갓 솟은 어리고 애띤 산(山). 주름진 긴 치맛자락을 꽂아 쥐고, 이슬이 굵은 태초의 칠색(七色)이 영롱한 풀밭을. 그 깊은 고요를 밟고……

 

빨래 나온 아낙네가 산(山)이 걸어오시네, 그 한마디에 산(山)은 무안해서 엉거주춤 주저앉아 버렸다. 치맛자락을 고쳐 지를 겨를도 없이. 너무나 수줍은 이 창조의 신(神)의 이마를 한 자락의 안개가 가려주었다.

 

흘러내린 그 자락에 바람은 영원히 희롱했다. 아아 두 치만 감아 꽂았더면, 우리 마을은 아늑한 골짜길 것을, 그리고 어린 나는 별빛처럼 빛나는 바다로 눈길을 돌리지 않고, 아아(峨峨)한 산꼭지에 조용히 동경(憧憬)을 묻었을 것을.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산(山)․소묘 4

 

 

어느 것은 웅크리고 앉아, 이마를 맞대고 수군거리듯, 어느 것은 힐끗이 돌아보고, 말쑥히 물러서고, 또한 어느 것은 어깨를 추스리고 서서 고개를 젖혀 하늘을 우러러 오불관(吾不關)의 태(態), 다만 어느 하나는 얌전히 동구(洞口) 앞에 이르러, 너붓이 절을 드리듯. 그것은 문안 온 외손자뻘.

 

*

 

나붓이 나들이 온 선녀련 듯 열두 폭 치맛자락을 사려 꽂았다. 다만 한 자락은 천연스럽게 바람에 맡기고…… 그 자락을 타고 사월달 긴긴 해를 두릅, 휘휘초, 취, 범벅궁이, 달래, 돌미나리, 산나물을 광우리마다 채운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朴木月, 1915.1.6~1978.3.24] 시인

본명은 영종(泳鍾). 1916년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출생하여 경상북도 경주(慶州)에서 자람. 1935년 대구 계성(啓聖)중학 졸업. 정지용(鄭芝溶)에 의해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청록집(靑鹿集)』(3인시), 『경상도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과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 『밤에 쓴 인생론(人生論)』 그밖의 저서로는 『문학의 기술(技術)』, 『실용문장대백과(實用文章大百科)』 등이 있음. 1953년 홍익대학교 조교수, 1961년 한양대학교 부교수 및 1963년 교수,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역임. 자유문학상, 5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 1978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