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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병기 시인 / 외로운 이 마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0.

이병기 시인 / 외로운 이 마음

 

 

입동(立冬)이 멀잖은데 아직도 날씨는 덥다

어제 두어 잔 찬 술을 마셨더니

이 밤이 들기도 전에 배가 자주 끓는다

 

잠은 든숭만숭 꿈으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피곤한 몸이 일어나기도 싫다가

첫새벽 참새 소리에 오도(悟道)한 듯하고나

 

한 포기 꽃도 없는 사막(沙漠)과 같은 이 생활(生活)

부귀나 영화는 아예 바랄것 없거니와

한 나이 더해 갈수록 더 외로운 이 마음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우뢰

 

 

한껏 찌고 우리고 나뭇잎 하나 까딱없고

돋는 달 연홍시 같고 마른 번개는 오락가락하다

 

짓구ㅊ은 바람 갑자기 일며 굵은 비 마구 뿌려 앞뒤창을 두드리고 우르르 우르르 벼락이 나려치고 뻔쩍뻔쩍 불칼을 휘날린다

 

책상 한머리 등은 자주 깜박이노니 보던 글도 두고 묵묵히 외로 앉아 나는 나의 한적(閒寂)을 깨닫노라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우리 님

 

 

아아 우리 님을 밉다고 말을 마라

갖은 그 얼굴을 일찍 보았는가

단장만 하고 나서면 천하일색이려니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정원(庭園)의 가을

 

 

우북히 솟아나던 차[茶]나무 다 베어 가고

상수리 익기도 전에 다투어 다 따아 가고

두어 대 산(山)옻나무의 단풍잎만 빨갛다

 

난(蘭)을 사랑하던 마음 무우와 배추로 옮겨

그 가뭄 그 더위와 함께 타고 오그라지다

지난 밤 소낙비 듣고 나도 도로 젊었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李秉岐) 시인 / 1891∼1968

호: 가람(伽藍). 시조 시인. 국문학자. 전북 익산에서 출생. 1913년에 관립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전념하였다.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의 시조로 침체된 시조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을 거쳐 1935년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었고, 그 후에<가람 시조집>을 발표, 자연의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42년에는<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다가 석방된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백철과 공저

로 <국문학 전사>를 간행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시에 압도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고, 저서에는 <국문학 개론> <가람 문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