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순 시인 / 백일몽(白日夢)
이 일편(一篇)을 꿀 먹은 벙어리와도 같이 영원(永遠)한 침묵(沈黙)에 숨쉬는 지기지우(知己之友)들에게 바치노라
내 일찌기 새파란 청춘시절(靑春時節) 오월(五月) 훈풍(薰風)의 한해 여름철 세계(世界)의 심장(心臟)의 고동(鼓動) 소리가 들리고 그 모공(毛孔)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듯 눈 부시게도 투명(透明)하고 고요한 오후(午後)의 한나절
장안(長安) 종로(鐘路) 한복판 어느 서사(書肆)의 어둠침침한 뒷방 골속에 나는 누워서 깊은 명상(瞑想)에 잠기다가 어느덧 깜박 조을았거니
그 꿈속에, 보라! 선풍(旋風)처럼 홀연(忽然)히 일어난 일대(一大) 풍악(風樂)의 선율(旋律)로 인(因)하여 세계(世界) 괴멸(壞滅)의 기적(奇蹟)은 일어났으니 거룩한 세계(世界) 괴멸(壞滅)의 기적(奇蹟)은 일어났으니
하늘과 땅과 뭇 꽃과 풀과 돌과 보석(寶石)과 하늘의 뭇 별과 바다 속의 뭇 어족(魚族)과 골방에 잠든 나와 나를 구찮게 구는 파리와 벼룩과 나를 둘러싼 바람벽과 그렇다! 천지(天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두두(頭頭) 물물(物物)이 돌연 일대(一大) 악보(樂譜)로 변하고
금(金) 목(木) 화(火) 토(土)― 오행(五行)과 뭇원자(原子)와 그리고 뭇생물(生物)의 혼령(魂靈)이 모두 성음(聲音)으로 화(化)하고 유(有)와 무(無)가, 생(生)과 사(死)가 모두 음악(音樂)으로 화(和)하여 돌아가……
마치 깊은 물 속에 일어나는 크나큰 바람소리 큰 바다의 밀물소리와 파도(波濤)소리 바닷속의 뭇 어족(魚族)이 춤추며 행진(行進)하는 소리 우뢰(雨雷)소리 지동(地動)소리 수해(樹海)의 바람소리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폭풍우(暴風雨) 몰아치는 소리 폭포(瀑布) 떨어지는 소리 여울 부닥치는 소리 설산(雪山) 무너지는 소리 빙산(氷山) 터지는 소리 천병만마(千兵萬馬) 달리는 소리 창공(蒼空)을 흔드는 프로펠러소리 지심(地心)을 두드리는 엔징소리 뭇 공장(工場)의 기계(機械) 돌아가는 소리 산(山)속의 호랑이소리 그 산(山)울림하는 소리 사자(獅子)소리 뱀떼 몰려가는 소리 개미떼 몰려가는 소리 벌떼 몰려드는 소리 황충이 떼 몰려드는 소리 시장(市場)에서 와글거리는 소리 닭소리 온갖 짐승소리 온갖 벌레소리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 뭇어린이들 어미젖 빠는 소리
얼어 붙었던 온갖 수맥(水脈)의 풀리는 소리 조춘(早春)에 뭇 풀이 땅을 뚫고 싹 터 오르는 소리 온갖 꽃들이 향기(香氣)를 풍기며 피어 열리는 소리 뭇 동물(動物)의 새 생명(生命)이 숨쉬는 소리
환상(幻想)의 세계(世界) 무너지는 소리 꿈의 바다 물결치는 소리
온갖 소리 소리가 한몫에 모이고 어울리고 화(和)하여 크나큰 풍악(風樂)을 일으키고 지악(地樂)을 이루어 온 누리는 전체(全體)가 빈틈 없는 하나의 그랜드․오케스트라․심포니로 움직여 흐르고……
무(無)의 바다는 밑 없이 샘솟아 우렁차게 용솟음치는 악곡(樂曲)의 소리로 터질 듯 아찔하게 맴돌고 소용돌이쳐 돌아가고……
내란 것은 그 속에 완전히 녹아 흘러 거창한 음악(音樂) 바다의 호수(湖水)와 함께 파도치며 구비쳐 돌아가 흐느껴 황홀(恍惚)한데
심연(深淵)속 같이 엄숙(嚴肅)한 경악(驚愕)과 경이(驚異)와 환희(歡喜)와 법열(法悅)의 절정(絶頂)의 한 찰나(刹那) 문득 꿈에서 깨어나 다시 한번 자아(自我)로 전락(轉落)한 나는 눈을 떠 보니 눈을 뜨고 보니
나와 방(房)안의 책상(冊床)과 그의 책(冊)들과 바람벽과 괘종(掛鍾)은 의연(依然)한 듯하면서도 방금 그 천래(天來)의 대(大)심포니의 여운(餘韻)에 그윽히 떨고 있어 이것이 꿈인가 꿈 아닌 꿈인가 꿈 속의 꿈 깨인 꿈인가 꿈인가 식무식간(識無識間)에서 의심(疑心)은 그윽하고 아득한데
이상도 할사 바로 아까 그 심포니의 여운(餘韻)이 완연(宛然)히 밖에서 들려 오지 않는가 나는 다시 한번 놀래어 눈을 부비고 귀를 기울이며 문(門) 밖에 나서보니 문(門) 밖에 나서보니
방금 대(大)심포니의 신비(神秘)스러운 무한량(無限量)의 비밀(秘密)과 선율(旋律)을 함뿍 호흡(呼吸)해 머금은 양 대낮의 휘황(輝煌)한 일광(日光)은 미묘(微妙)히 떨며 천지(天地)에 넘쳐 흘러 만물(萬物)을 광피(光被)하고 녹히는 듯 한데
아아 놀랍고 이상할사 저 서대문(西大門) 대로(大路) 수평선(水平線) 저쪽으로 똥통(桶) 마차(馬車)의 장사진(長蛇陳)의 마지막 꼬리가 그 심포니의 그윽한 여운(餘韻)과 함께 사라져가며 있지 아니한가
쇠똥 말똥 개똥 돼지똥 닭똥 새똥 사람의 똥 똥 똥 똥…… 그렇다 의심(疑心)할 여지(餘地)없이 뚜렷한 똥통마차(桶馬車)의 장사진(長蛇陳)이어라
나는 그리고 개우쳤노라 그 우주적(宇宙的)인 심포니의 참 동인(動因)은 진실(眞實)로 이 똥통마차(桶馬車)이었음을―
낮꿈에 취(醉)한 나의 골방 앞을 여러 말굽소리 수레 바퀴소리 요란히 떨떨거리며 행진(行進)하는 장사진(長蛇陳)의 똥통마차(桶馬車)의 우렁찬 율동(律動)은 백주(白晝) 대도(大道)를 울리고 골방을 울리고 벽(壁)을 울리고 구들을 울리고 구둘은 낮잠 자는 내 몸을 울리고 내 몸은 내 꿈을 흔들어 꿈과 깨임 사이 한 순간(瞬間)에 영원(永遠)의 기적(奇蹟)이 생기었음을!
천상만상(千象萬象)의 잡연(雜然)한 소음(騷音)이 창조적(創造的)인 나의 꿈속에 스며들어 비단결같이 고운 오색(五色) 영롱(玲瓏)한 내 꿈의 체를 걸러 조화(造化) 무궁(無窮)한 꿈 천재(天才)의 표현활동(表現活動)의 과정(過程)을 거쳐 우주적(宇宙的)인 대(大)심포니의 조화(調和)를 이루었음을……
나는 깨달았노라 명확히 깨쳤노라 꿈이 무엇이며 현실(現實)이 무엇인가를 나는 무엇이며 나 아닌게 무엇인가를 순간(瞬間)이 무엇이요 영원(永遠)이 무엇임을 생(生)과 사(死)가 무엇이요 유(有)와 무(無)가 무엇임을
아아 꿈의 기적(奇蹟)이여 꿈의 기적(奇蹟)이여 아아 꿈의 맛이여 꿈의 내음새여 온 누리가 일곡(一曲)의 악장(樂章)속에 휩쓸리고 휘말리어 우렁차게 구을러 돌아가는 거룩하고 신비(神秘)한 꿈의 기적(奇蹟)이여
삼십유여(三十有餘)의 세월(歲月)이 꿈결같이 흘러 가 불혹(不惑)의 고개를 넘어서 영구(永久)히 이 거룩한 꿈의 기적(奇蹟)을 가슴속 깊이 안은 채 아아 나는 벙어리 꿀 먹은 벙어리 아아 나는 영원(永遠)한 벙어리 꿀 먹은 벙어리 기적(奇蹟)의 꿀 먹은 벙어리
오 인류(人類)를 위한 거룩한 태초(太初)의 역천자(逆天者) 푸로메튜스여 다시 한번 하늘의 굳이 닫힌 불 창고(倉庫)를 깨뜨리고 그 신성(神聖)한 하늘의 불을 새로 가져 오라 영원(永遠)한 기적(奇蹟)의 꿀 먹은 이놈의 벙어리 냉가슴 그 불 붙어 폭파(爆破)하리 그 불로써만 답답한 이내 가슴 녹혀지리 그렇고사 내 자유자재(自由自在)의 몸되어 그 기적(奇蹟) 말하리 기적(奇蹟)으로 하여금 기적(奇蹟) 자신(自身)을 말하게 하리 그렇다 기적(奇蹟)을 말하리라
아앗! 벙어리 말하고 돌도 말하고 벽(壁)도 말하고 목침(木枕)도 말하고 짝지도 말하고 영장도 말하고 백골(白骨)도 말하고 무(無)도 말하고 손가락이 말하고 발가락이 말하고 눈썹이 말하고 ― 유상(有象) 무상(無象)이 모두 말하는 기적(奇蹟)의 기적(奇蹟)이여 기적(奇蹟)아니 기적(奇蹟)이여 오오― 기적(奇蹟)의 자기 소멸(消滅) 기적(奇蹟)의 자기 해탈(解脫)이여 오오 기적(奇蹟)은 어디 있으며 기적(奇蹟) 아닌 건 어디 있느냐
아아 면사포(面紗布) 벗은 우주(宇宙)의 본면목(本面目)이여 복면(覆面) 벗은 세계(世界)의 적나체(赤裸體)여 가면(假面) 벗은 만유(萬有)의 노골상(露骨相)이여 자유해방(自由解放)한 자아(自我)의 진실상(眞實相)이여 모두가 그대로 기적(奇蹟) 아니고녀
오오― 인류(人類)여 생(生)을 사랑하고 사(死)를 감사(感謝)하고 밥 먹고 똥 누다가 울며 웃으며 눈감으면 그뿐일까 피와 땀과 눈물로 일체(一切) 허위(虛僞)와 위선(僞善)과 추악(醜惡)과 모독(冒瀆)과 싸우며 진(眞)과 선(善)과 미(美)와 성(聖)의 추구(追求)와 그 실천(實踐)으로 생(生)의 보람을 삼는 기특한 동물(動物)이란 구차(苟且)한 영예(榮譽)로 족(足)할까
또 하나의 우주(宇宙)를 자기 손으로 창조(創造)할 수 있고 파괴(破壞)할 수 있는 능력(能力)이 부여(賦與)된 실재자(實在者)임이 유일(唯一)의 자랑일까 억만(億萬) 번 죽었다 깨어나도 달리는 어찌할 도리(道理) 없는 숙명(宿命)의 주인공(主人公)이여 본연(本然)히 알면서도 본연(本然)히 아지 못할 운명(運命)이여
오오― 무(無)여 공(空)이여 허(虛)여 현(玄)이여 상(象)이여 있다 해도 남고 없다 해도 남고 있고도 남고 없고도 남고 알고도 남고 모르고도 남고 믿고도 남고 안 믿고도 남고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어찌 할래야 어찌 할 수도 없고 낳[生]도 않고 죽도 않고 그저 본래(本來) 제작으로 왕래무상(往來無常)하고 은현자재(隱顯自在)한 영원(永遠)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본존(本尊)이여 우주(宇宙)를 낳고 만유(萬有)를 낳고 키우고 거두고 없애는 활살자재(活殺自在)하고 밑도 끝도 없이 조화(造化) 무궁(無窮)한 생명(生命)의 혈맥(血脈)이요 호흡(呼吸)이요 모태(母胎)요 태반(胎盤)이여
오 크나 큰 무덤이여 영원(永遠)한 적멸궁(寂滅宮)이여 오 신성(神聖) 불가침(不可侵)의 어머니여 오 신성(神聖) 불가침(不可侵)의 어머니여 무섭게 좋은 어머니 한(限)없이 고마운 어머니 그러나 좋아서 미운 어머니 고마워 딱한 어머니 이러면 어쩌잔 말이요 이 딱한 엄마야 그러면 어쩌잔 말이요 이 딱한 엄마야 어쩌잔 말이요 어쩌잔 말이요
하늘은 오늘도 속모르게 푸르고 흰 구름은 유유(悠悠)히 흐르는데 앞뜰 마당 상록수(常綠樹) 밑에 암놈을 거느린 호치(豪侈)스런 장닭 한 마리 황홀(恍惚)히 눈부신 대낮을 자랑스럽게 긴목 빼어 울어 마친 그 그윽한 여운(餘韻)에 앞뜰 마당은 홀연(忽然) 적멸궁(寂滅宮)의 정적(靜寂) 완연(宛然)하고 담장 밖에 제가끔 가슴마다 가지가지의 현실(現實)과 형형색색(形形色色)의 꿈을 품고 천파만파(千波萬波)로 물결치며 분주히 왕래하는 중생(衆生)의 행진곡(行進曲) 속에 당신의 발자욱 소리 그윽히 들려오느고녀 허공(虛空)에 인(印)쳐도 영원(永遠)히 사라지지 않을 알고도 아지 못할 당신의 발자욱 소리 그윽히 들려 오는고녀
오― 구원(久遠) 불멸(不滅)의 나의 발자욱 소리 오― 구원(久遠) 불멸(不滅)의 나의 발자욱 소리!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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