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시인 / 처(妻)
귀히 자란 몸에 정주도 모르다가 이 집 들어오며 물 긷고 방아 찧고 잔시늉 안한 일 없이 가는 뼈도 굵었다
맑은 나의 살림 다만 믿는 그의 한몸 몹시 섬약하고 병도 또한 잦건마는 그래도 성한 양으로 참고 그저 바궈라
나이 더하더라도 마음이야 다르던가 백년(百年) 동안이 만나던 그날 같고 마주 푼 귀영머리는 나보다도 검어라
이미 맺은 인연 그대로 잇고 이어 다시 태어나되 서로 바꾸어 되어 이생의 못다한 정을 저생에서 받으리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청매(靑梅) 3
봄마다 방긋방긋 구슬보다 영롱(玲瓏)하다 낼 모레면 다 필 듯 벗들도 오라 하였다 진실로 너로 하여서 떠날 길도 더뎠다
대체 복(福)이란 건 길고 짜를 뿐이다 요(夭)니 수(壽)니 함도 이걸 일컬음인데 짜르고 긴 그 동안을 우리들은 산다 한다
오늘 아침에야 봉 하나이 벌어졌다 홀로 더불어 두어 잔을 마시고 좀먹은 고서(古書)를 내어 상(床)머리에 펼쳤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파랑새
파랑새 날아오면 그이도 온다더니 파랑새 날아가도 그이는 아니 온다 오늘도 아니 오시니 내일이나 올는가
기다려지는 마음 하루가 백 년 같다 새로 이가 나고 흰머리 다시 검어라 그이가 오신 뒤에야 나는 죽어 가리라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파초(芭蕉)
다시 옮겨 심어 분에 두고 보는 파초(芭蕉) 설레는 눈보라는 창문을 치건마는 제먼여 봄인 양하고 새움 돋아 나온다
청동(靑銅) 화로 하나 앞에다 놓아 두고 파초(芭蕉)를 돌아보다 가만히 누웠더니 꿈에도 따듯한 내 고향을 헤매이고 말았다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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