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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상순 시인 / 불나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1.

오상순 시인 / 불나비

 

 

불나비!

사랑의 불 속에 뛰어들어

자기(自己)야 있고 없고

 

불나비!

 

생명(生命)의 불 속에 날아들어

목숨이야 있고 없고

 

불나비!

 

비밀(秘密)의 불 속에 달겨들어

목숨과 죽음을 넘어

그 `무엇'에 부닥치려는

무서운 몸부림이여

 

MEHR LICHT!에의 일편단심(一片丹心)

그 생리(生理)의 실천자(實踐者)

 

영원(永遠)히 처절(凄絶)하고 비장(悲壯)한

`프로메튜스'의 후예(後裔)여 화신(化身)이여

 

깊은 밤빛같이 깜고

좁쌀알같이 작은

고 얄미운 눈 동자(瞳子)

 

오직

불과 빛을 향(向)해서만 마련되었기에

살아서 깜빡이는 순간(瞬間)이 없고

죽어서 눈 감지 못하는 숙명(宿命)이여

불도 오히려 서늘한 듯

무서운 너 정열(情熱)의 불꽃이여

 

단지

빛을 위하여 나고

빛을 위하여 살고

빛을 위하여 죽는―

 

한없이 비장(悲壯)하고 찬란(燦爛)하고

거룩한 너 운명(運命)의 조화(造化)여

 

생명(生命)보다 죽음보다

삶보다 사랑보다

 

오직 불과 빛

타오르는 불빛을―

 

불빛속에 침투(浸透)되어 무한(無限)히 감추어진

생명(生命)과 죽음을 빼앗고도 남음이 있을……

그 속 모를 불빛의 신비(神秘)의 심연(深淵)속에

마구 뛰어들어 날아들어

부닥쳐 몰입(沒入)하려는 너 뼈저리게 안타까운……

 

꽃가루인양 향기(香氣)롭고 보드럽고

꽃잎파리마냥 고운 나래의 기적(奇蹟)이여

 

불속에 몇번이고 거듭 거듭 덤벼들어

그 나래가 타고 알몸이 타고 기진맥진(氣盡脈盡)

땅바닥에 굴러 떨어져 소리없는 신음(呻吟) 속에

 

고 작은 가슴팍 팔락거리며

기식(氣息)은 암암(唵唵)해도

불 속에 불붙는 영원(永遠)한 향수(鄕愁)여.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시인 / 새 하늘이 열리는 소리

 

 

낙엽(落葉)을 밟으며

거리를 가도

서럽잖은 눈망울은

사슴을 닮고……

 

높은 하늘 속

날개 펴고 훠얼 훠얼

날으고 싶은

맑은 서정은 구름을 닮아라.

 

바람을 타지 않은

어린 갈대들……

 

물결이 거슬려 흘러도

매운 연기가 억수로 휩쓸어도

미움을 모르는 가슴은

산을 닮았다

바다를 닮았다

하늘을 닮았다

 

……………

 

이 밤

생각에 지치고

외로움에 지치고

슬픔에 지치고

사랑에 지치고

그리고

삶에 지친

모든 마음들이 이리로 오면

생각이 트이고

외로움이 걷히고

슬픔이 걷히고

사랑이 열리고

 

그리고

새 삶의 길이 보이리니

그것은 어쩌면 하늘의 목소리……

오오

이 밤의 향연이여

새 하늘이 열리는 소리여.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吳相淳, 1894.8.9 ~ 1963.6.3] 시인

1894년 서울에서 출생. 호는 공초(空超). .1906년 경신 학교(儆新學校) 졸업. 1918년 도시샤(同志社) 대학 종교철학과 졸업. 1920년 김억(金億), 남궁벽(南宮壁),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 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폐허》의 동인으로 그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24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 중앙 학림(동국 대학교의 전신) 교수 역임.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과 대통령상 등을 수상. 1963년 지병으로 사망. 주요작품으로 「한잔술」, 「첫날밤」, 「방랑의 마음」,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낙엽」 등이 다수 있음. 저서로는 死後 발간된  《오상순 시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