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이병기 시인 / 처(妻)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1.

이병기 시인 / 처(妻)

 

 

귀히 자란 몸에 정주도 모르다가

이 집 들어오며 물 긷고 방아 찧고

잔시늉 안한 일 없이 가는 뼈도 굵었다

 

맑은 나의 살림 다만 믿는 그의 한몸

몹시 섬약하고 병도 또한 잦건마는

그래도 성한 양으로 참고 그저 바궈라

 

나이 더하더라도 마음이야 다르던가

백년(百年) 동안이 만나던 그날 같고

마주 푼 귀영머리는 나보다도 검어라

 

이미 맺은 인연 그대로 잇고 이어

다시 태어나되 서로 바꾸어 되어

이생의 못다한 정을 저생에서 받으리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청매(靑梅) 3

 

 

봄마다 방긋방긋 구슬보다 영롱(玲瓏)하다

낼 모레면 다 필 듯 벗들도 오라 하였다

진실로 너로 하여서 떠날 길도 더뎠다

 

대체 복(福)이란 건 길고 짜를 뿐이다

요(夭)니 수(壽)니 함도 이걸 일컬음인데

짜르고 긴 그 동안을 우리들은 산다 한다

 

오늘 아침에야 봉 하나이 벌어졌다

홀로 더불어 두어 잔을 마시고

좀먹은 고서(古書)를 내어 상(床)머리에 펼쳤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파랑새

 

 

파랑새 날아오면 그이도 온다더니

파랑새 날아가도 그이는 아니 온다

오늘도 아니 오시니 내일이나 올는가

 

기다려지는 마음 하루가 백 년 같다

새로 이가 나고 흰머리 다시 검어라

그이가 오신 뒤에야 나는 죽어 가리라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파초(芭蕉)

 

 

다시 옮겨 심어 분에 두고 보는 파초(芭蕉)

설레는 눈보라는 창문을 치건마는

제먼여 봄인 양하고 새움 돋아 나온다

 

청동(靑銅) 화로 하나 앞에다 놓아 두고

파초(芭蕉)를 돌아보다 가만히 누웠더니

꿈에도 따듯한 내 고향을 헤매이고 말았다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李秉岐) 시인 / 1891∼1968

호: 가람(伽藍). 시조 시인. 국문학자. 전북 익산에서 출생. 1913년에 관립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전념하였다.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의 시조로 침체된 시조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을 거쳐 1935년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었고, 그 후에<가람 시조집>을 발표, 자연의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42년에는<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다가 석방된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백철과 공저

로 <국문학 전사>를 간행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시에 압도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고, 저서에는 <국문학 개론> <가람 문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