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생토(生土)
울산 접경(蔚山接境)에서도 영일(迎日)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마른 논바닥 같은 얼굴들.
봉화(奉化)에서도 춘양(春陽)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억만 년(億萬年)을 산 듯한 얼굴들.
인삼(人蔘)이 명물(名物)인 풍기(豊基)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척척한 금이 간 얼굴들.
다만 문경(聞慶) 새재를 넘는 길목에서 히죽이 웃는 그 얼굴은 시뻘건 생토(生土) 같았다.
-<경상도의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박목월 시인 / 서가(書架)
친구들이 서가(書架)에 나란하다. 외로운 서재(書齋) 등불 앞에서 나와 속삭이려고 이런 밤을 기다렸나 보다. 반쯤 비에 젖은 그들의 영혼(靈魂)…… 나도 외롭다. 한 권을 뽑아들면 커피점(店)에서 만난 그분과는 사뭇 다른 다정(多情)한 눈짓. 외로울 때는 누구나 정(情)다워지나 보다. 따뜻한 영혼의 미소(微笑). 때로 말씨가 서투른 구절(句節)도 있군. 그것이야 대수롭지 않은 겉치레 벗기고 보면 아아 놀라운 그 분의 하늘 ―가만히 나는 책을 덮는다. (얘기에 싫증이 나서가 아닐세) 돌아 앉아 그 분의 말을 생각해 보려고 그래. 과연 인생은 이처럼 서러운가, 하고. 때로는 긴 밤을 생각에 잠겨 밝히면 새벽 찬 기운에 서가(書架)는 아아(峨峨)한 산맥(山脈). 친구는 없고…… 골짜기에 만년설(萬年雪) 눈부신 빙하(氷河).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소묘 A
비닐 우산을 받쳐들고 사람들은 일자리로 나가고 있었다. 생활을 근심하며 인사를 하며. 우산 속 모든 얼굴은 젖어 있었다. 그들의 눈에 우산이 보일까. 보이지 않는 호젓한 심령의 둘레.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동안 끊임없이 내리게 될 이슬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비닐 우산을 하나씩 받쳐들고 지하로(地下路)로 향하고 있다. 세종로에서. 지상에서.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소묘 B
200여 킬로를 달려도 빈 가지뿐이었다.
서울에서 청주까지 청주에서 수안보까지 새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일까. 조국의 자연은 이처럼 허하고
어린 날의 그 귀여운 것들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썰렁한 멧부리를 돌면 눈이 박힌 골짜기에 눈발이 치고 빈 손을 치켜든 나무
혹은 금이 간 백밀러에 클로즈업되는 어린 여차장의 갈라진 얼굴.
참으로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책상보자기나 커틴 자락에 은실로 수놓아 장식되었을 뿐.
망각의 여울가에 지저귀는 귀여운 입부리
혹은 금이 간 백밀러에 일그러진 채 축소된 어린 여차장의 발갛게 언 얼굴.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소찬(素饌)
오늘 나의 밥상에는 냉이국 한 그릇. 풋나물 무침에 신태(新苔). 미나리 김치. 투박한 보시기에 끓는 장 찌개.
실보다 가는 목숨이 타고난 복록(福祿)을. 가난한 자의 성찬(盛饌)을. 묵도(黙禱)를 드리고 젓가락을 잡으니 혀에 그득한 자연의 쓰고도 향깃한 것이여. 경건한 봄의 말씀의 맛이여.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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