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시인 / 풀벌레
해만 설핏하면 우는 풀벌레 그 밤을 다하도록 울고 운다
가까이 멀리 예서 제서 쌍져 울다 외로 울다 연달아 울다 뚝 그쳤다 다시 운다 그 소리 단조하고 같은 양 해도 자세 들으면 이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다 다르구나
남몰래 겨우는 시름 누워도 잠 아니 올 때 이런 소리도 없었은들 내 또한 어이하리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함박꽃
이제야 피는 양은 때가 늦어 그리는지 푸른 잎 사이사이 흰 숭이 붉은 숭이 제여곰 수줍은 듯이 고개 절로 숙인다
유달리 풍성하고 화려한 그 얼굴을 우거진 녹엽(錄葉) 속에 으늑히 숨겨 두고 행여나 뉘라 알까봐 향기마저 없더라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향(香)의 가을
노깡 화분(花盆)에다 백련(白蓮)을 심었더니 중추(仲秋) 초하룻날 두어 송이 피어났다 그 향(香)을 함께 맡으려 벗을 오라 하였다
뜰밑 계손(溪蓀)과 섞여 봄비에 옮긴 국화(菊花) 잦은 진딧물과 그 장마를 다 겪고 나서 누르고 희고 붉으며 벌이 먼여 모여든다
천지 그 변화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완도(莞島) 해남(海南)서 온 유자(柚子)도 향이 없고 레몬꽃 한두 송이가 피어 홀로 뽐낸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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