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이병기 시인 / 풀벌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2.

이병기 시인 / 풀벌레

 

 

해만 설핏하면 우는 풀벌레 그 밤을 다하도록 울고 운다

 

가까이 멀리 예서 제서 쌍져 울다 외로 울다 연달아 울다

뚝 그쳤다 다시 운다 그 소리 단조하고 같은 양 해도 자세 들으면 이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다 다르구나

 

남몰래 겨우는 시름 누워도 잠 아니 올 때 이런 소리도 없었은들 내 또한 어이하리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함박꽃

 

 

이제야 피는 양은 때가 늦어 그리는지

푸른 잎 사이사이 흰 숭이 붉은 숭이

제여곰 수줍은 듯이 고개 절로 숙인다

 

유달리 풍성하고 화려한 그 얼굴을

우거진 녹엽(錄葉) 속에 으늑히 숨겨 두고

행여나 뉘라 알까봐 향기마저 없더라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향(香)의 가을

 

 

노깡 화분(花盆)에다 백련(白蓮)을 심었더니

중추(仲秋) 초하룻날 두어 송이 피어났다

그 향(香)을 함께 맡으려 벗을 오라 하였다

 

뜰밑 계손(溪蓀)과 섞여 봄비에 옮긴 국화(菊花)

잦은 진딧물과 그 장마를 다 겪고 나서

누르고 희고 붉으며 벌이 먼여 모여든다

 

천지 그 변화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완도(莞島) 해남(海南)서 온 유자(柚子)도 향이 없고

레몬꽃 한두 송이가 피어 홀로 뽐낸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李秉岐) 시인 / 1891∼1968

호: 가람(伽藍). 시조 시인. 국문학자. 전북 익산에서 출생. 1913년에 관립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전념하였다.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의 시조로 침체된 시조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을 거쳐 1935년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었고, 그 후에<가람 시조집>을 발표, 자연의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42년에는<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다가 석방된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백철과 공저

로 <국문학 전사>를 간행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시에 압도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고, 저서에는 <국문학 개론> <가람 문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