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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목월 시인 / 순지(純紙)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2.

박목월 시인 / 순지(純紙)

 

 

순지(純紙) 같은 사람을 생각한다.

구수하게 푸짐한 인간성(人間性).

그런 사람이 쉽사리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어리숙한 나무를 생각한다.

나무는 다 어리숙하지만

하다못해 넉넉한 신발을 생각한다.

발이 죄이지 않는

편안한 신발도 쉽지 않지만

큼직한 그릇을 생각한다.

아무렇게나 주물러

소박하게 구어낸

그런 그릇은 쓸모 없지만

순지(純紙)를 생각한다.

순지(純紙)로

안을 바른

은근하게 내명(內明)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쉽지 않지만

말 오줌 냄새 찌릿한

투박하고 푸짐한

한국(韓國)의 순지(純紙).

 

-<경상도의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박목월 시인 / 시(詩)

 

 

나는

흔들리는 저울대(臺).

시(詩)는

그것을 고누려는 추(錘).

겨우 균형(均衡)이 잡히는 위치(位置)에

한 가락의 미소(微笑).

한 줌의 위안(慰安).

한 줄기의 운율(韻律).

이내 무너진다.

하늘 끝과 끝을 일렁대는 해와 달.

아득한 진폭(振幅).

생활(生活)이라는 그것.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아가(雅歌)

 

 

나는 당신을 잉태했습니다.

나직한 푸른 핏줄……

성모 마리아가 인자(人子)를 잉태하듯

내가 마리아를 잉태했습니다.

그의 조용한 음성

그의 가는 목

그리고 설핏한 구름의 눈매

도란도란 귀에 익은 말씨의

그 서러운 이슬 하늘.

 

*

 

도화(桃花)가 만발했습니다.

그 충만한 가지

당신을 향한

내 모습을 보십시오.

오롯한 누리에 하얀 대낮에

피어오른 환한 촛불 암꽃술

저윽히 꽃잎 하나 이우는데

비로소 마음 한 모 기도로 풀리는데

 

*

 

무성한 당신의 모발

그 풍족한 여유

청결한 당신의 피부

그 청아한 유혹

바람에 불꽃이 깃드는

동굴은 툭 틔어서

크낙한 말씀을

나는 잉태했습니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야반음(夜半吟)

 

 

소나기가 비롯하는 야반(夜半)의

깊은 침묵을

 

홀연히 두두둑

파초(芭蕉) 잎새.

 

두발은 희끗이

서리가 덮히고

 

비로소

한밤에 잠도 깨이고.

 

자욱하게 아득한 것을

 

마음은

화운(和韻)하고.

 

멀고 가까운 것을

새삼스러이 헤아리노니

 

침상(枕上)에는

오롯하게 조으는 불빛.

 

이 밤을

밤만큼 넓은 잎새를 펼치고

 

파초(芭蕉)는 차라리

외롭지 않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여운(餘韻)

 

 

산(山)은 산(山)인 양 의연하고

강(江)은 흘러 끝이 없다

댓잎에 별빛 초가삼간

이슬 젖은 돌다리 모과수(木果樹) 그늘

하늘 밖 달빛에 바람은 자고

댓잎에 그윽한 바람소리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박목월[朴木月, 1915.1.6~1978.3.24] 시인

본명은 영종(泳鍾). 1916년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출생하여 경상북도 경주(慶州)에서 자람. 1935년 대구 계성(啓聖)중학 졸업. 정지용(鄭芝溶)에 의해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청록집(靑鹿集)』(3인시), 『경상도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과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 『밤에 쓴 인생론(人生論)』 그밖의 저서로는 『문학의 기술(技術)』, 『실용문장대백과(實用文章大百科)』 등이 있음. 1953년 홍익대학교 조교수, 1961년 한양대학교 부교수 및 1963년 교수,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역임. 자유문학상, 5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 1978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