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순지(純紙)
순지(純紙) 같은 사람을 생각한다. 구수하게 푸짐한 인간성(人間性). 그런 사람이 쉽사리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어리숙한 나무를 생각한다. 나무는 다 어리숙하지만 하다못해 넉넉한 신발을 생각한다. 발이 죄이지 않는 편안한 신발도 쉽지 않지만 큼직한 그릇을 생각한다. 아무렇게나 주물러 소박하게 구어낸 그런 그릇은 쓸모 없지만 순지(純紙)를 생각한다. 순지(純紙)로 안을 바른 은근하게 내명(內明)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쉽지 않지만 말 오줌 냄새 찌릿한 투박하고 푸짐한 한국(韓國)의 순지(純紙).
-<경상도의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박목월 시인 / 시(詩)
나는 흔들리는 저울대(臺). 시(詩)는 그것을 고누려는 추(錘). 겨우 균형(均衡)이 잡히는 위치(位置)에 한 가락의 미소(微笑). 한 줌의 위안(慰安). 한 줄기의 운율(韻律). 이내 무너진다. 하늘 끝과 끝을 일렁대는 해와 달. 아득한 진폭(振幅). 생활(生活)이라는 그것.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아가(雅歌)
나는 당신을 잉태했습니다. 나직한 푸른 핏줄…… 성모 마리아가 인자(人子)를 잉태하듯 내가 마리아를 잉태했습니다. 그의 조용한 음성 그의 가는 목 그리고 설핏한 구름의 눈매 도란도란 귀에 익은 말씨의 그 서러운 이슬 하늘.
*
도화(桃花)가 만발했습니다. 그 충만한 가지 당신을 향한 내 모습을 보십시오. 오롯한 누리에 하얀 대낮에 피어오른 환한 촛불 암꽃술 저윽히 꽃잎 하나 이우는데 비로소 마음 한 모 기도로 풀리는데
*
무성한 당신의 모발 그 풍족한 여유 청결한 당신의 피부 그 청아한 유혹 바람에 불꽃이 깃드는 동굴은 툭 틔어서 크낙한 말씀을 나는 잉태했습니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야반음(夜半吟)
소나기가 비롯하는 야반(夜半)의 깊은 침묵을
홀연히 두두둑 파초(芭蕉) 잎새.
두발은 희끗이 서리가 덮히고
비로소 한밤에 잠도 깨이고.
저 자욱하게 아득한 것을
마음은 화운(和韻)하고.
멀고 가까운 것을 새삼스러이 헤아리노니
침상(枕上)에는 오롯하게 조으는 불빛.
이 밤을 밤만큼 넓은 잎새를 펼치고
파초(芭蕉)는 차라리 외롭지 않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여운(餘韻)
산(山)은 산(山)인 양 의연하고 강(江)은 흘러 끝이 없다 댓잎에 별빛 초가삼간 이슬 젖은 돌다리 모과수(木果樹) 그늘 하늘 밖 달빛에 바람은 자고 댓잎에 그윽한 바람소리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목월 시인 / 영탄조(詠嘆調) 외 4편 (0) | 2020.02.13 |
---|---|
오상순 시인 / 생(生)의 철학(哲學) 외 1편 (0) | 2020.02.12 |
이병기 시인 / 풀벌레 외 2편 (0) | 2020.02.12 |
오상순 시인 / 불나비 외 1편 (0) | 2020.02.11 |
박목월 시인 / 생토(生土) 외 4편 (0) | 2020.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