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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상순 시인 / 생(生)의 철학(哲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2.

오상순 시인 / 생(生)의 철학(哲學)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질(本質)이 모두

`생(生)'이라는

철학적(哲學的) 직각(直覺)의 충동(衝動) 속에

돌에다 귀를

가마­ㄴ히 기울여 보고

쇠에다 손을

슬며시 대어 보았다

미친 듯이…….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시인 /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風景)

부제: 아시아의 진리(眞理)는 밤의 진리(眞理)다

 

 

아시아는 밤이 지배한다 그리고 밤을 다스린다

밤은 아시아의 마음의 상징(象徵)이요 아시아는 밤의 실현(實現)이다

아시아의 밤은 영원(永遠)의 밤이다, 아시아는 밤의 수태자(受胎者)이다

밤은 아시아의 산모(産母)요 산파(産婆)이다

아시아는 실(實)로 밤이 낳아 준 선물이다

밤은 아시아를 지키는 주인(主人)이요 신(神)이다

아시아는 어둠의 검이 다스리는 나라요 세계(世界)이다.

 

아시아의 밤은 한(限)없이 깊고 속 모르게 깊다

밤은 아시아의 심장(心臟)이다, 아시아의 심장(心臟)은 밤에 고동(鼓動)한다

아시아는 밤의 호흡(呼吸)기관이요 밤은 아시아의 호흡(呼吸)이다

밤은 아시아의 눈이다, 아시아는 밤을 통해서 일체상(一切相)을 뚜렷이 본다

올빼미처럼

밤은 아시아의 귀다 아시아는 밤에 일체음(一切音)을 듣는다.

 

밤은 아시아의 감각(感覺)이요 감성(感性)이요 성욕(性慾)이다

아시아는 밤에 만유애(萬有愛)를 느끼고 임을 포옹(抱擁)한다

밤은 아시아의 식욕(食慾)이다, 아시아의 몸은 밤을 먹고 생성(生成)한다

아시아는 밤에 그 영혼(靈魂)의 양식을 구(求)한다, 맹수(猛獸)처럼……

밤은 아시아의 방순(芳醇)한 술이다, 아시아는 밤에 취(醉)하여 노래하고 춤춘다.

 

밤은 아시아의 마음이요 오성(悟性)이요 그 행(行)이다

아시아의 인식(認識)도 예지(叡智)도 신앙(信仰)도 모두 밤의 실현(實現)이요 표현(表現)이다

오― 아시아의 마음은 밤의 마음……

아시아의 생리계통(生理系統)과 정신체계(精神體系)는 실로 아시아의 밤의 신비적(神秘的) 소산(所産)인저.

 

밤은 아시아의 미학(美學)이요 종교(宗敎)이다

밤은 아시아의 유일(唯一)한 사랑이요 자랑이요 보배요 그 영광(榮光)이다

밤은 아시아의 영혼(靈魂)의 궁전(宮殿)이요 개성(個性)의 터요 성격(性格)의 틀이다

밤은 아시아의 가진 무진장의 보고(寶庫)이다 마법사의 마술(魔術)의 보고와도 같은―-

밤은 곧 아시아요 아시아는 곧 밤이다

아시아의 유구(悠久)한 생명(生命)과 개성(個性)과 성격(性格)과 역사(歷史)는 밤의 기록(記錄)이요

밤신(神)의 발자취요 밤의 조화(造化)요 밤의 생명(生命)의 창조적(創造的) 발전사(發展史)―-

 

보라! 아시아의 산하(山河) 대지(大地)와 물상(物相)과 풍물(風物)과 격(格)과 문화(文化)―-

유상(有相) 무상(無相)의 일체상(一切相)이 밤의 세례(洗禮)를 받지 않는 자(者) 있는가를,

아시아의 산맥(山脈)은 아시아의 물의 `리듬'을 상징(象徵)하고 아시아의 물의 `리듬'은 아시아의 밤의 `리듬'을 상징(象徵)하고……

아시아의 딸들의 칠빛 같은 머리의 흐름은 아시아의 밤의 그윽한 호흡(呼吸)의 `리듬'.

 

한 손으로 지축(地軸)을 잡아 흔들고 천지(天地)를 함토(含吐)하는 아무리 억세고 사나운 아시아의 사나이라도 그 마음 어느 구석인지 숫처녀의 머리털과도 같이 끝 모르게 감돌아드는 밤 물결의 흐름 같은 `리듬'의 곡선(曲線)은 그윽히 서리어 흐르나니

 

그리고 아시아의 아들들의 자기를 팔아 술과 미(美)와 한숨을 사는

호탕(浩蕩)한 방유성(放遊性)도 감당키 어려운 이 밤 때문이라 하리라

밤에 취하고 밤을 사랑하고 밤을 즐기고 밤을 탄미(嘆美)하고 밤을 숭배(崇拜)하고

밤에 나서 밤에 살고 밤 속에 죽는 것이 아시아의 운명(運命)인가

 

아시아의 침묵(沈黙)과 정밀(靜謐)과 유적(幽寂)과 고담(枯淡)과 전아(典雅)와 곡선(曲線)과 여운(餘韻)과 현회(玄晦)와 유영(幽影)과 후광(後光)과 또 자미(滋味) 제호미―는 아시아의 밤신(神)들의 향연(饗宴)의 교향곡(交響曲)의 악보(樂譜)인저

오― 숭엄(崇嚴)하고 유현(幽玄)하고 신비(神秘)롭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아시아의 밤이여!

 

태양(太陽)은 연소(燃燒)하고 자격(刺激)하고 과장(誇張)하고 오만(傲慢)하고 군림(君臨)하고 명령(命令)한다

그리고 남성적(男性的)이요 부격(父格)이요 적극적(積極的)이요 공세(攻勢)적이다

따라서 물리적(物理的)이요 현실적(現實的)이요 학문적(學問的)이요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이요 투쟁적(鬪爭的)이요 물체적(物體的)이요 물질적(物質的)이다.

 

태양의 아들과 딸은 기승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건설하고 파괴하고 돌진한다

백일하(白日下)에 자신(自信)있게 만유(萬有)를 분석하고 해부하고 종합(綜合)하고 통일(統一)하고

성(盛)할 줄만 알고 쇠(衰)하는 줄 모르고 기세(氣勢) 좋게 모험하고 제작(製作)하고 외치고 몸부림치고 피로(疲勞)한다

차별상(差別相)에 저회(低廻)하고 유(有)의 면(面)에 고집(固執)한다

여기 뜻아니한 비극(悲劇)의 배태(胚胎)와 탄생(誕生)이 있다.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吳相淳, 1894.8.9 ~ 1963.6.3] 시인

1894년 서울에서 출생. 호는 공초(空超). .1906년 경신 학교(儆新學校) 졸업. 1918년 도시샤(同志社) 대학 종교철학과 졸업. 1920년 김억(金億), 남궁벽(南宮壁),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 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폐허》의 동인으로 그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24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 중앙 학림(동국 대학교의 전신) 교수 역임.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과 대통령상 등을 수상. 1963년 지병으로 사망. 주요작품으로 「한잔술」, 「첫날밤」, 「방랑의 마음」,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낙엽」 등이 다수 있음. 저서로는 死後 발간된  《오상순 시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