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영탄조(詠嘆調)
나이 오십(五十) 가까우면 기운 내의는 안 입어야지. 그것이 쉬울세 말이지. 성한 것은 자식들 주고 기운 것만 내 차례구나. 겉만 멀끔 차리고 나니, 눈가림만 하자는 것이네. 설사 남이야 알 리 없지만 내가 나를 못 속이는걸. 내가 나를 못 속이는걸. 뭘, 그러세요. 기운 것이나마 따스면 됐지. 아내의 말일세. 얼마나, 사람이 억만 년 살면 등만 따스면 살 것인가.
지금은 엄동. 눈이 얼어, 빙판이구나. 등만 따스면 그만이라, 겉치레도 벗어버릴까. 안팎이 여일(如一)하고 표리없이 살자는데 어라, 바로 너로구나. 누더기 걸친 우리 내외 보고 빙긋 마주 빙긋 겨울 삼동을 지내는구나.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박목월 시인 / 오른편
궁핍하고 어려울 때마다 오른편을 살펴본다. 주께서 일러주신 말씀의 방향을. 괴롭고 답답할 때마다 오른편을 살펴본다. 주께서 일러주신 믿음의 방향을. 진실로 믿는 자에게는 오른편이 있다. 신앙의 그물만 던지면 미어지게 고기를 잡을 수 있다. 설사 그것이 비린내가 풍기는 현실의 고기가 아닐지라도 굶주린 영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는 비늘이 싱싱하게 빛나는 말씀의 생선.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는 자만이 믿음과 신뢰의 그물을 던지는 자만이 말씀 안에 그물을 던지는 자만이 위로와 축복으로 가득한 때로는 베드로처럼 펄펄 살아 있는 고기를 그물이 미어지게 건져 올릴 수 있다.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박목월 시인 / 왕십리
내일 모레가 육십인데 나는 너무 무겁다. 나는 너무 느리다. 나는 외도(外道)가 지나쳤다. 가도 가도 바람이 입을 막는 왕십리.
-<경상도의 가랑잎>가랑잎, 민중서관, 1968
박목월 시인 / 용인행(龍人行)
목사님의 소개로 용인엘 갔었다. 내외가 고속버스를 타고. 평당 3,000원이면 싼값이지요. 산기슭에서 소개업자가 말했다. 나는 양지바른 터전을 눈으로 더듬고, 서녘 하늘 같은 눈으로 아내는 나를 쳐다보았다. 뫼뿌리가 어두워 들자, 먼 마을에 등불 하나 둘 켜지고 그럴수록 황량해 보이는 산하. 여보, 그만 가요. 울먹이는 아내의 목소리가 가슴에 젖어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고속버스를 탔다. 무덤 속으로 달리는 차창에 비치는 내외의 모습. 바람과 모래의 손이 마음을 쓰담아주었다. 우리에게 이미 토지는 이승의 것이 아니었다. 가즈런한 한 쌍의 묘와 한 덩이의 돌이 떠오르는 흘러가는 차창의 스크린에 울부짖는 것은 바람소리도 짐승소리도 아니었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우슬초
우슬초가 무슨 풀일까 나는 모르지만 퍼렇게 돋아나는 기름진 잎새 우슬초가 무슨 풀일까 나는 모르지만 안다는 것의 그 허황한 오만. 주여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옵소서. 정한 마음을 당신이 창조해 주심으로 나는 새롭게 눈을 뜨고 내 안에 돋아나는 기름진 잎새. 진실로 우슬초가 무슨 풀일까. 모름으로 더듬는 나의 믿음의 촉각에 살아나는 풀. 안다는 것의 그 새까만 장님의 세계에서 주여 당신이 마련해 주신 오늘의 광명 어린 아기의 마음으로 쌓아 올리는 예루살렘 성 믿음의 주춧돌에 돋아나는 우슬초.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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