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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상순 시인 / 아시아의 여명(黎明)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3.

오상순 시인 / 아시아의 여명(黎明)

 

 

아시아의 밤

오, 아시아의 밤

말없이 묵묵(黙黙)한 아시아의 밤의 허공(虛空)과도 같은 속 모를 어둠이여

제왕(帝王)의 관곽(棺槨)의 칠(漆)빛보다도 검고

폐허(廢墟)의 제단(祭壇)에 엎드려 경건(敬虔)히 머리숙여

기도(祈禱)드리는 백의(白衣)의 처녀(處女)들의 흐느끼는

그 어깨와 등위에 물결쳐 흐르는

머리털의 빛깔보다도 짙으게 검은 아시아의 밤

오, 아시아의 밤의 속 모를

어둠의 깊이여.

 

아시아의 땅!

오, 아시아의 땅!

몇번이고 영혼(靈魂)의 태양(太陽)이 뜨고 몰(沒)한 이 땅

찬란(燦爛)한 문화(文化)의 꽃이 피고 진 이 땅!

역사(歷史)의 추축(樞軸)을 잡아 돌리던

주인공(主人公)들의 수(數)많은 시체(屍體)가

이 땅 밑에 누워 있음이여.

 

오, 그러나

이제 이단(異端)과 사탄에게 침해(侵害)되고

유린(蹂躪)된 세기말(世紀末)의 아시아의 땅

살륙(殺戮)의 피로 물들인

끔찍한 아시아의 바다빛이여.

 

아시아의 사나이들의 힘찬 고환(睾丸)은

요귀(妖鬼)의 아금니에 걸리고

아시아의 처녀(處女)들의 신성(神聖)한 유방(乳房)은

독사(毒蛇)의 이빨에 내맡겨졌어라

오― 아시아의 비극(悲劇)의 밤이여

오― 아시아의 비극(悲劇)의 밤은

길기도 하여라.

 

하늘은 한(限)없이 높고 땅은 두텁고

융융(隆隆)한 산악(山嶽) 울창(鬱蒼)한 삼림(森林)

바다는 깊고 호수(湖水)는 푸르르고

들은 열리고 사막(沙漠)은 끝없고

태양(太陽)은 유달리 빛나고

 

산(山)에는 산(山)의 보물(寶物)

바다에는 바다의 보물(寶物)

유풍(裕豊)하고 향기(香氣)로운 땅의 보물(寶物)

무궁무진(無窮無盡)한 아시아의 천혜(天惠)!

 

만고(萬古)의 비밀(秘密)과 경이(驚異)와 기적(奇蹟)과 신비(神秘)와

도취(陶醉)와 명상(瞑想)과 침묵(沈黙)의 구현체(具顯體)인

아시아!

철학미답(哲學未踏)의 비경(秘境)

돈오미도(頓悟未到)의 성지(聖地) 대(大)아시아!

독주(毒酒)와 아편(阿片)과 미(美)와 선(禪)과

무궁(無窮)한 자존(自尊)과 무한(無限)한 오욕(汚辱)

축복(祝福)과 저주(咀呪)와 상반(相伴)한

기나긴 아시아의 업(業)이여.

 

끝없는 준순(逡巡)과 미몽(迷夢)과 도회(韜晦)와

회의(懷疑)와 고민(苦悶)의 상암(常闇)이여

오, 아시아의 운명(運命)의 밤이여

이제 우리들은 부르노니

새벽을!

이제 우리들은 외치노니

우뢰(雨雷)를!

이제 우리들은 비노니

이 밤을 분쇄(粉碎)할 벽력(霹靂)을!

 

오, 기나긴 신음(呻吟)의 병상(病床)!

몽마(夢魔)에 눌렸던 아시아의 사자(獅子)는

지금 잠깨고

유폐(幽閉)되었던 땅 밑의 태양(太陽)은 움직인다

오, 태양(太陽)이 움직인다

오, 먼동이 터온다.

 

미신(迷信)과 마술(魔術)과 명상(瞑想)과 도취(陶醉)와 향락(享樂)과

탐닉(耽溺)에 준동(蠢動)하는 그대들이여

이제 그대들의 미녀(美女)를 목 베고

독주(毒酒)의 잔(盞)을 땅에 쳐 부수고

아편(阿片)대를 꺾어 버리고

선상(禪床)을 박차고 일어서라

자업자득(自業自得)하고 자승자박(自繩自縛)한

계박(繫縛)의 쇠사슬을 끊고

유폐(幽閉)의 땅 밑에서 일어서 나오라.

 

이제 여명(黎明)의 서광(瑞光)은 서린다

지평선(地平線) 저쪽에

힘차게 붉은 조광(朝光)은

아시아의 하늘에 거룩하게 비추어

오, 새 세기(世紀)의 동이 튼다

아시아의 밤이 동튼다

오, 웅혼(雄渾)하고 장엄(壯嚴)하고 영원(永遠)한

아시아의 길이

끝없이 높고 깊고 멀고 길고

아름다운 동방(東方)의 길이

다시 우리들을 부른다.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吳相淳, 1894.8.9 ~ 1963.6.3] 시인

1894년 서울에서 출생. 호는 공초(空超). .1906년 경신 학교(儆新學校) 졸업. 1918년 도시샤(同志社) 대학 종교철학과 졸업. 1920년 김억(金億), 남궁벽(南宮壁),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 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폐허》의 동인으로 그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24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 중앙 학림(동국 대학교의 전신) 교수 역임.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과 대통령상 등을 수상. 1963년 지병으로 사망. 주요작품으로 「한잔술」, 「첫날밤」, 「방랑의 마음」,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낙엽」 등이 다수 있음. 저서로는 死後 발간된  《오상순 시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