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거시기'의 노래
팔자 사난 `거시기'가 옛날 옛적에 대국으로 조공 가는 뱃사공으로 시험 봐서 뽑히어 배 타고 갔네. 삐그덕 삐그덕 창피하지만 아무렴 세때 밥도 얻어먹으며…….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그렇지만 요만큼한 팔자에다도 바다는 잔잔키만 하지도 않아, 어디만큼 가다가는 폭풍을 만나 거 있거라 으릉대는 파도에 몰려 아무데나 뵈는 섬에 배를 대었네.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제아무리 시장한 용왕이라도 한 사람만 잡수시면 요기될 테니 제비 뽑아 누구 하나 바치고 빌자' 사공들은 작정하고 제비 뽑는데 거시기가 또 걸렸네. 불쌍한 녀석.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비는 것도 효력은 있던 때였지. 바다는 잔잔해져 배는 떠나고 거시기만 혼자서 섬에 남았네. 먹을테면 먹어 봐라 힘줄 돋우며 이왕이면 버텨보자 버티어 섰네.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용왕이 나와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보다 센 마귀가, 우리 식구를 다 잡아먹고, 나와 딸만 겨우 남았다. 그대는 활 잘 쏘는 화랑 아닌가? 우리 다음은 네 차례니 맘대로 해라'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거시기는 이판사판 생각을 했네―. `힘 안 주고 물렁물렁 먹히기보다 힘 다하다 덩그렇게 죽는 게 낫다' 그래서 그들에게 마귀가 오자 젖먹이 힘 다해서 활줄 당겼네.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그럭허면 맞힐 수도 있기는 있지. 어째서 안 맞기만 하고 말손가? 배내기 때 힘까지 모두 합쳐서 거시기가 쏜 화살이 마귀 맞혔네. 어쩌다가 운 좋게시리 마귀 맞혔네.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그래설랑 그 상으로 용왕 딸 얻어 가슴팍에 꽃가지 끼리인 듯이 끼리고 살았다네, 오손―도손. 사난 팔자 상팔자로 오손―도손. 마누라도 없갔느냐, 오손―도손.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서정주 시인 / `꼬끼오!' 우는 스위스 회중시계
알프스 산 여신님에 눈을 맞춰서 융프라우 선녀님에 입을 맞춰서 리노강 인어하곤 목욕을 같이 해서 왕노릇도 종노릇도 시시해 다 그만두고 해와 달빛하고만 함께 살아 오면서 정확하게 정확하게만 만든 시계니, 나그네여 노자가 남았거들랑 이백 불만 내고서 하나 가져 보겠나?
주네브의 시계장수 말씀이 하도나 좋아 그 수만 개 귀뚜라미 수풀 같은 시계들 중에서 때맞추어 `꼬끼오……' 수탉 소리도 내시는 울음 좋은 회중시계를 하나 사서 차고 가나니.
인제는 벌써나 저승에 드신 우리 무애 양주동 교수도 `됐다'고 하시겠군. 시간 되면 조끼주머니에서 찌르릉 울어대던 회중시계만 믿고 살던 양주동 교수. 너무나 싼 강사료니 많이나 해 살아 보자고 다음 강의에 늦을세라, 찌르릉 우는 회중만 믿고 살았던 무애 양주동 교수도 `썩 잘됐다' 하시겠군.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간통사건과 우물
간통사건이 질마재 마을에 생기는 일은 물론 꿈에 떡 얻어먹기같이 드물었지만 이것이 어쩌다가 주마담(走馬痰) 터지듯이 터지는 날은 먼저 하늘은 아파야만 하였습니다. 한정 없는 땡삐떼에 쏘이는 것처럼 하늘은 웨―하니 쏘여 몸서리가 나야만 했던 건 사실입니다.
`누구네 마누라허고 누구네 남정네허고 붙었다네!' 소문만 나는 날은 맨 먼저 동네 나팔이란 나팔은 있는 대로 다 나와서 `뚜왈랄랄 뚜왈랄랄' 막 불어 젖히고, 꽹과리도, 징도, 소고(小鼓)도, 북도 모조리 그대로 가만 있진 못하고, 퉁기쳐 나와 법석을 떨고, 남녀노소, 심지어는 강아지 닭들까지 풍겨져 나와 외치고 달리고, 하늘도 아플 밖에는 별 수가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픈 하늘을 데불고 가축 오양깐으로 가서 가축용의 여물을 날라 마을의 우물들에 모조리 뿌려 메꾸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한 해 동안 우물물을 어느 것도 길어 마시지 못하고, 산골에 들판에 따로 따로 생수 구먹을 찾아서 갈증을 달래어 마실 물을 대어갔습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걸궁배미
세 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네.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
농부가 속의 이 구절을 보면, 모 심다가 남은 논을 하늘에 뜬 반달에다가 비유했다가 냉큼 그것을 취소하고 아무래도 진짜 초생달만큼이야 할소냐는 느낌으로 고쳐 가지는 농부들의 약간 겸손하는 듯한 마음의 모양이 눈에 선히 잘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이 논배미 다 심고서 걸궁배미로 넘어가세. 하는 데에 오면
네가 무슨 걸궁이냐, 무당음악이 걸궁이지. 하고 고치는 구절은 전연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 걸궁배미라는 논배미만큼은 하나 에누리할 것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무당의 성악이요, 기악이요, 또 그 병창인 것이다. 그 질척질척한 검은 흙은 물론, 거기 주어진 오물의 거름, 거기 숨어 농부의 다리의 피를 빠는 찰거머리까지 두루 합쳐서 송두리째 신나디 신난 무당의 음악일 따름인 것이다.
그러고, 걸궁에는 중들이 하는 걸궁도 있는 것이고, 중의 걸궁이란 결국 부처님의 고오고오 음악, 부처님의 고오고오 춤 바로 그런 것이니까, 이런 쪽에서 이걸 느껴 보자면, 야! 참 이것 상당타.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겁(劫)*의 때
석가모니의 조국 네팔의 사람들은 히말라야 산골 물로만 그 몸을 씻을 뿐 아직도 거의 세숫비누를 쓰지 않아 삼삼하게는 고운 때가 산 그림자처럼 끼었다.
오억 삼천 이백만 년쯤을 하루쯤으로 잡아 살기 마련이라면 이건 제절로 그리 되는 아주 썩 좋은 것이라고 한다.
* 불교의 한 시간 단위인 겁(劫)―칼파(Kalpa)의 하나씩의 길이는 이 땅의 시간 수로 치면 5억 3천 2백만 년에 해당한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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