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순 시인 / 어둠을 치는 자(者)
바다속처럼 깊은 밤 주검같이 고요한 어둠의 밤 희랍 조각(彫刻)에 보는 듯한 완강(頑强)히 용솟음치는 골육(骨肉)의 주인(主人) 젊음에 타는 그는 그 어둠 한가운데에 끝없고 한(限)없이 넓은 벌판 대지(大地) 위에 꺼질 듯이 두 발을 벌려 딛고 서서 힘의 상징(象徵), 우옹(牛翁)같은 그의 팔! 무쇠로 만든 것같은 그 손을 주먹 쥐어 터질 듯이 긴장(緊張)하게 부술 듯한 확신(確信)있는 모양으로 어둠을 치도다 허공(虛空)을 치도다! 그리고 어둠과 허공(虛空)을 깊이 잠근 안개의 바다를 치도다.
잠기어 나리는 안개는 퍼부어 흐르는 땀과 한가지로 그의 몸 위에 타도다! 밑 모르는 불꽃에 닿는 힘없는 이슬의 모양으로 어둠과 허공(虛空)의 비밀(秘密) 부수는 듯한 그의 침은 끊임없이 치고 치고 또 치도다! 안개의 바다는 점차로 쓰러지도다 그리고 그 어둠의 빛은 어느덧 멀리 희미하게 변(變)해 오도다.
오― 힘의 상징(象徵)! 침의 용사(勇士)는 그 변(變)해 오는 어둠과 허공(虛空)의 벌판과 대지(大地) 위에 넘어가도다! 오! 그는 쓰러지도다! 산(山)속의 거목(巨木)같이…….
오― 대지(大地)는 이상(異常)한 소리로 오도다 어둠과 허공(虛空)은 알 수 없는 춤을 추며 알 수 없는 웃음 웃도다.
오― 저 대지(大地)의 끝으로부터 고요히 발자욱 소리도 없이 넘어오는 여명(黎明)을 영원(永遠)한 서광(曙光)의 서림은 위대(偉大)한 싸움으로 쓰러진 젊은 용자(勇者)의 모양을 대지(大地) 위에 발견하는 그 순간(瞬間)에 그의 시체(屍體)를 안아 싸도다 고요히 소리도 없이 그를 조상(吊喪)하는 듯 그를 축복(祝福)하는 듯…….
그의 몸은 벌써 돌같이 굳어져 버렸으나 그의 입술 위에는 오히려 미진(未盡)한 나머지의 표정(表情) 서리도다.
오― 이대(異大)한 어둠은 가도다 오― 위대(偉大)한 서광(曙光)은 오도다.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시인 / 일진(一塵)
나는 하나의 티끌이다 이 하나의 티끌 속에 우주(宇宙)를 포장(包藏)하고 무한(無限)한 공간(空間)을 끝없이 움직여 달린다.
나는 한 알의 원자(原子)이다 이 한 알의 원자(原子) 속에 육합(六合)을 배태(胚胎)하고 영원(永遠)한 시간(時間)을 끊임없이 흐른다.
나는 하나의 티끌 한 알의 원자(原子) 하나의 티끌 한 알의 원자(原子)인 나는 우주(宇宙)와 꼭 같은 생리(生理)와 정혼(精魂)을 내포(內包)한 채 감각(感覺)을 감각(感覺)하고 지각(知覺)을 지각(知覺)하고 감정(感情)을 감정(感情)하고 의욕(意慾)을 의욕(意慾)하고…… 우주(宇宙)의 호흡(呼吸)을 호흡(呼吸)하고 우주(宇宙)의 맥박(脈搏)을 맥박(脈搏)하고 우주(宇宙)의 심장(心臟)을 고동(鼓動)하나니
한 티끌의 심장(心臟)의 고동(鼓動)의 도수(度數)에 따라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지구(地球)가 움직여 돌아가고 바다의 조류(潮流)가 고저(高低)하고 산악(山嶽)의 호흡(呼吸)이 신축(伸縮)한다.
오! 그러나 그러나 한번 감정(感情)이 역류(逆流)하여 노기(怒氣)를 띄고 한데 뭉쳐 터지면 황홀(恍惚)하고 신비(神秘)한 광채(光彩)의 무지개 찬란(燦爛)한 속에 우주(宇宙)는 폭발(爆發)하여 무(無)로 환원(還元)하나니
오! 일진(一塵)의 절대(絶對)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운명(運命)이여! 오! 일진(一塵)의 절대(絶對) 신비(神秘)한 운명(運命)이여!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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