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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고려(高麗) 호일(好日)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4.

 서정주 시인 / 고려(高麗) 호일(好日)

 

 

숙종 삼 년 시월 상달 휘영청히 밝은 날.

고려 땅에 죄수는 하나도 없어

감옥 속은 모조리 텡텡 비이고,

그 빈 자리 황국(黃菊)처럼 피는 햇살들.

그 햇살에 배어나는 단군의 웃음.

그 웃음에 다시 열린 하늘의 신시(神市)!

그 신시에 물들여 구운 청자들!

운학문(雲鶴文)의 운학문(雲鶴文)의 고려청자들!

 

    ―『고려사절요』 제7권, 「숙종명효대왕 10년」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서정주 시인 / 고요

 

 

이 고요 속에

눈물만 가지고 앉았던 이는

이 고요 다 보지 못하였네.

 

이 고요 속에

이슥한 삼경의 시름

지니고 누웠던 이도

이 고요 다 보지는 못하였네.

 

눈물,

이슥한 삼경의 시름,

그것들은

고요의 그늘에 깔리는

한낱 혼곤한 꿈일 뿐,

 

이 꿈에서 아주 깨어난 이가

비로소

만길 물 깊이의

벼락의

향기의

꽃새벽의

옹달샘 속 금동앗줄을

타고 올라오면서

임 마중 가는 만세 만세를

침묵으로 부르네.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고향 난초

 

 

내 고향 아버님 산소 옆에서 캐어 온 난초에는

내 장래를 반도 안심 못하고 숨 거두신 아버님의

반도 채 다 못 감긴 두 눈이 들어 있다.

내 이 난초 보며 으시시한 이 황혼을

반도 안심 못 하는 자식들 앞일 생각타가

또 반도 눈 안 감기어 멀룩멀룩 눈감으면

내 자식들도 이 난초에서 그런 나를 볼 것인가.

 

아니, 내 못 보았고, 또 못 볼 것이지만

이 난초에는 그런 내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눈,

또 내 아들과 손자 증손자들의 눈도

그렇게 들어 있는 것이고, 들어 있을 것인가.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서정주 시인 / 그애가 물동이의 물을...

원제 : 그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그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애의 이마에 들어 그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와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기다림

 

 

내 기다림은 끝났다.

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이 대추굽이를 넘어간 뒤

인젠 내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지나간 소만(小滿)의 때와 맑은 가을날들을

내 이승의 꿈잎사귀, 보람의 열매였던

이 대추나무를

인제는 저승 쪽으로 들이밀꺼나.

내 기다림은 끝났다.

 

신라초, 정음사, 1961

 

 


 

 

서정주 시인 / 기억

 

 

그애는 육날 메투릴 신고

손톱에는 모싯물이 들어 있었지.

고구려 때 모싯물이 들어 있었지.

그애 손톱의 반달 속으로

저녁때 잦아들던 뻐꾹새 소리

나와 둘이 숨 모아 받아들이고,

그애 손톱의 반달 속에서 다시 뻗쳐 나가는 뻐꾹새 소리

나와 둘이 숨 모아 뻗쳐 보내던

그 계집아이는…….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