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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상순 시인 / 어둠을 치는 자(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4.

오상순 시인 / 어둠을 치는 자(者)

 

 

바다속처럼 깊은 밤

주검같이 고요한 어둠의 밤

희랍 조각(彫刻)에 보는 듯한

완강(頑强)히 용솟음치는 골육(骨肉)의 주인(主人)

젊음에 타는 그는

그 어둠 한가운데에

끝없고 한(限)없이 넓은 벌판 대지(大地) 위에

꺼질 듯이

두 발을 벌려 딛고 서서

힘의 상징(象徵), 우옹(牛翁)같은 그의 팔!

무쇠로 만든 것같은

그 손을 주먹 쥐어

터질 듯이 긴장(緊張)하게

부술 듯한 확신(確信)있는 모양으로

어둠을 치도다 허공(虛空)을 치도다!

그리고

어둠과 허공(虛空)을 깊이 잠근

안개의 바다를 치도다.

 

잠기어 나리는 안개는

퍼부어 흐르는 땀과 한가지로

그의 몸 위에 타도다!

밑 모르는 불꽃에 닿는

힘없는 이슬의 모양으로

어둠과 허공(虛空)의 비밀(秘密) 부수는 듯한

그의 침은 끊임없이

치고 치고 또 치도다!

안개의 바다는 점차로

쓰러지도다

그리고

그 어둠의 빛은 어느덧

멀리 희미하게 변(變)해 오도다.

 

오― 힘의 상징(象徵)!

침의 용사(勇士)는

그 변(變)해 오는

어둠과 허공(虛空)의 벌판과 대지(大地) 위에

넘어가도다!

오! 그는

쓰러지도다!

산(山)속의 거목(巨木)같이…….

 

오― 대지(大地)는

이상(異常)한 소리로 오도다

어둠과 허공(虛空)은

알 수 없는 춤을 추며

알 수 없는 웃음 웃도다.

 

오― 저 대지(大地)의 끝으로부터

고요히 발자욱 소리도 없이

넘어오는 여명(黎明)을

영원(永遠)한 서광(曙光)의 서림은

위대(偉大)한 싸움으로 쓰러진

젊은 용자(勇者)의 모양을

대지(大地) 위에 발견하는 그 순간(瞬間)에

그의 시체(屍體)를 안아 싸도다

고요히 소리도 없이

그를 조상(吊喪)하는 듯

그를 축복(祝福)하는 듯…….

 

그의 몸은 벌써

돌같이 굳어져 버렸으나

그의 입술 위에는 오히려

미진(未盡)한 나머지의 표정(表情) 서리도다.

 

오― 이대(異大)한 어둠은 가도다

오― 위대(偉大)한 서광(曙光)은 오도다.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시인 / 일진(一塵)

 

 

나는 하나의 티끌이다

이 하나의 티끌 속에

우주(宇宙)를 포장(包藏)하고

무한(無限)한 공간(空間)을

끝없이 움직여 달린다.

 

나는 한 알의 원자(原子)이다

이 한 알의 원자(原子) 속에

육합(六合)을 배태(胚胎)하고

영원(永遠)한 시간(時間)을

끊임없이 흐른다.

 

나는 하나의 티끌 한 알의 원자(原子)

하나의 티끌 한 알의 원자(原子)인 나는

우주(宇宙)와 꼭 같은 생리(生理)와 정혼(精魂)을

내포(內包)한 채

감각(感覺)을 감각(感覺)하고

지각(知覺)을 지각(知覺)하고

감정(感情)을 감정(感情)하고

의욕(意慾)을 의욕(意慾)하고……

우주(宇宙)의 호흡(呼吸)을 호흡(呼吸)하고

우주(宇宙)의 맥박(脈搏)을 맥박(脈搏)하고

우주(宇宙)의 심장(心臟)을 고동(鼓動)하나니

 

한 티끌의 심장(心臟)의 고동(鼓動)의 도수(度數)에 따라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지구(地球)가 움직여 돌아가고

바다의 조류(潮流)가 고저(高低)하고

산악(山嶽)의 호흡(呼吸)이 신축(伸縮)한다.

 

오! 그러나 그러나

한번 감정(感情)이 역류(逆流)하여 노기(怒氣)를 띄고

한데 뭉쳐 터지면

황홀(恍惚)하고 신비(神秘)한 광채(光彩)의 무지개 찬란(燦爛)한 속에

우주(宇宙)는 폭발(爆發)하여 무(無)로 환원(還元)하나니

 

오!

일진(一塵)의 절대(絶對)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운명(運命)이여!

오!

일진(一塵)의 절대(絶對) 신비(神秘)한 운명(運命)이여!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吳相淳, 1894.8.9 ~ 1963.6.3] 시인

1894년 서울에서 출생. 호는 공초(空超). .1906년 경신 학교(儆新學校) 졸업. 1918년 도시샤(同志社) 대학 종교철학과 졸업. 1920년 김억(金億), 남궁벽(南宮壁),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 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폐허》의 동인으로 그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24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 중앙 학림(동국 대학교의 전신) 교수 역임.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과 대통령상 등을 수상. 1963년 지병으로 사망. 주요작품으로 「한잔술」, 「첫날밤」, 「방랑의 마음」,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낙엽」 등이 다수 있음. 저서로는 死後 발간된  《오상순 시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