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운복령(雲伏嶺)
심산(深山) 고사리, 바람에 도르르 말리는 꽃고사리.
고사리 순에사 산짐승 내음새, 암수컷 다소곳이 밤을 새운 꽃고사리.
도롯이 숨이 죽은 고사리밭에, 바람에 말리는 구름길 팔십리(八十里).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박목월 시인 / 은행동(銀杏洞)
아, 나는 지도를, 지도 위의 은행동(銀杏洞)을 더듬어간다. 옛날의 번지를. 그 집 주인을. 다, 친숙하고 어질고, 따뜻한 분들을. 문등(門燈)이 환한 그 집 밤을 착각처럼 확실한 은행동(銀杏洞)을.
이슬비는 온다. 자옥한 달빛처럼 다음 네거리는 그 집 골목. 여기였는데 여기는 잿더미 은행동(銀杏洞)은 하얀 재가 되었다. 보얗게 삭은 옛날의 번지를 그 집 주인을.
이슬비는 온다. 달빛처럼 망각의 은은한 베일을 짜며 저기였을까. 저기는 잿더미. 예배당 자리만 까맣게 삭고, 다만 벽이 한 폭(幅) 올연히 남았다.
은행동(銀杏洞)을 간다. 불이 환한 은행동(銀杏洞). 그것은 옛날의 골목인 것을. 발자국이 남는다. 잿더미 위에. 망각에서 살아오는 나의 발자국을 아무런 감동도 느낀 바 없음.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일박(一泊)
1
어린것들 옆에 잠자리를 펴고 나는 하룻밤을 지낸다. 어린것들 옆에 나의 하룻밤의 서글프고 허전한 꿈.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그것은 허황한 위구심(危懼心). 다만 지금은 어린것들 옆에 잠자리를 펴고 이부자리 자락으로 귀를 덮는다.
2
내일은 내일. 내일의 아침은 신(神)의 영역. 봉(封)해진 세계. 내일 근심은 내일의 근심. 오늘은 오늘로서 족한. 다만 지금은 어린것들 옆에 잠자리를 펴고. 찬란한 성진(星辰)의 허허로운 공간에. 어린것들 옆에 바람과 구름의 허허로운 공간에. 다만 지금은 어린것들 옆에. 흐르는 강물…… 귀를 잠그고. 어린것들 옆에 잠자리를 펴고. 찌걱거리는 뗏목 위에 다만 지금은 찌걱거리는 뗏목 위에 잠자리를 펴고 이부자리 자락으로 귀를 덮는다.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박목월 시인 / 임
내사 애달픈 꿈꾸는 사람 내사 어리석은 꿈꾸는 사람
밤마다 홀로 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
기인 한밤을 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
어느 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목월 시인 / 임에게
안타까운 마음은
은은히 흔들리는 강 나룻배
누구를 사모하는 까닭도 없이
문득 흔들리는 강 나룻배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주 시인 / 고려(高麗) 호일(好日) 외 5편 (0) | 2020.02.14 |
---|---|
오상순 시인 / 어둠을 치는 자(者) 외 1편 (0) | 2020.02.14 |
서정주 시인 / `거시기'의 노래 외 4편 (0) | 2020.02.13 |
오상순 시인 / 아시아의 여명(黎明) (0) | 2020.02.13 |
박목월 시인 / 영탄조(詠嘆調) 외 4편 (0) | 2020.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