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자수정(紫水晶) 환상
돌 안에 바다가 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혹은 자줏빛 치맛자락이 나부낀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눈을 감은 것은 감고 뜬 자는 뜨고 있다. 돌 안에 구름이 핀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혹은 원시의 불길이 타고 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치렁치렁한 성좌 아래서 땅 끝으로 사라져 가는 새떼 해면(海面)에 흩어지는 울음소리 눈을 감는 자는 감고 뜨는 자는 뜨면 돌조차 투명해지는 돌 안에 바다가 넘실거린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원시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운거리는 자줏빛 치맛자락이 영원에서 살아난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적막한 식욕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식성(食性).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손과 주인이 겸상을 하고 산나물을 곁들여 놓고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너고 저승을 갈 때, 보이소 아는 양반 앙인기요 보이소 웃마을 이생원 앙인기요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절로 젓가락이 가는 쓸쓸한 음식.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중심부에서
호텔의 오전은 호밀밭처럼 조용했다. 간간이 문이 닫히고 또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먼 복도 끝에서. 나의 노우트의 흰 스페이스는 눈부시게 정결했다. 그 중심부에서 쩔렁쩔렁 울리는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순은(純銀)의 고리를 단, 세례 요한의, 사도 바울의. 성애가 녹아내리는 유리창 밖으로 세상은 고기비늘처럼 찬란했다. 눈에 덮힌 기왓골에서 만세를 부르는 묵시록(黙示錄)의 아침 햇빛.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춘분(春分)
자하문 동대문 문(門) 밖으로 나가는 길에 달아오르는 해. 앞산머리의 부끄러운 이마. 오오냐. 자하문 동대문 문 안으로 들어오는 길에 기우는 햇발. 앞산머리의 어두운 이마. 오오냐 오냐.
-<경상도의 가랑잎>민중서관, 1968
박목월 시인 / 층층계
적산가옥(敵産家屋) 구석에 짤막한 층층계…… 그 이층(二層)에서 나는 밤이 깊도록 글을 쓴다. 써도 써도 가랑잎처럼 쌓이는 공허감(空虛感). 이것은 내일(來日)이면 지폐(紙幣)가 된다. 어느 것은 어린것의 공납금(公納金). 어느 것은 가난한 시량대(柴糧代). 어느 것은 늘 가벼운 나의 용전(用錢). 밤 한 시, 혹은 두 시. 용변(用便)을 하려고 아랫층으로 내려가면 아랫층은 단칸방(單間房). 온 가족(家族)은 잠이 깊다. 서글픈 것의 저 무심(無心)한 평안(平安)함. 아아 나는 다시 층층계를 밟고 이층(二層)으로 올라간다. (사닥다리를 밟고 원고지(原稿紙) 위에서 곡예사(曲藝師)들은 지쳐 내려오는데……) 나는 날마다 생활(生活)의 막다른 골목 끝에 놓인 이 짤막한 층층계를 올라와서 샛까만 유리창에 수척한 얼굴을 만난다. 그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아버지라는 것이다.
*
나의 어린것들은 왜(倭)놈들이 남기고 간 다다미 방에서 날무처럼 포름쪽쪽 얼어 있구나.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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