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꽃
가신 이들의 헐떡이는 숨결로 곱게 곱게 씻기운 꽃이 피었다.
흐트러진 머리털 그냥 그대로, 그 몸짓 그 음성 그냥 그대로, 옛 사람의 노래는 여기 있어라.
오― 그 기름 묻은 머리빡 낱낱이 더워 땀 흘리고 간 옛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하늘 위에 있어라.
쉬어 가자 벗이여 쉬어서 가자 여기 새로 핀 크낙한 꽃그늘에 벗이여 우리도 쉬어서 가자
만나는 샘물마다 목을 축이며 이끼 낀 바윗돌에 턱을 고이고 자칫하면 다시 못 볼 하늘을 보자.
귀촉도, 정음사, 1948
서정주 시인 / 나그네의 꽃다발
내 어느 해던가 적적하여 못 견디어서 나그네 되어 호올로 산골을 헤매다가 스스로워 꺾어 모은 한 옹큼의 꽃다발― 그 꽃다발을 나는 어느 이름 모를 길가의 아이에게 주었느니.
그 이름 모를 길가의 아이는 지금쯤은 얼마나 커서 제 적적해 따 모은 꽃다발을 또 어떤 아이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그리고 몇십 년 뒤 이 꽃다발의 선사는 또 한 다리를 건네어서 내가 못 본 또 어떤 아이에게 전해질 것인가?
그리하여 천년이나 천오백 년이 지난 어느 날에도 비 오다가 개이는 산 변두리나 막막한 벌판의 해 어스름을 새 나그네의 손에는 여전히 꽃다발을 쥐이고 그걸 받을 아이는 오고 있을 것인가?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나의 시
어느 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친척의 부인을 모시고 성안 동백꽃나무 그늘에 와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 듯이 앉아 계시고, 나는 풀밭 위에 흥근한 낙화(落花)가 안쓰러워 주워 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 놓았습니다. 쉬임 없이 그 짓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 뒤 나는 년년(年年)히 서정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 꽃들을 주워다 드리던―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아줄 이가 땅 위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주워 모은 꽃들은 저절로 내 손에서 땅 위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 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서정주 시인 / 내가 돌이 되면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내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 삼천 사발의 냉숫물.
내 남루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내 영원은
내 영원은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가다 가단 후미진 굴헝이 있어, 소학교 때 내 여선생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이쁜 여선생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내려가선 혼자 호젓이 앉아 이마에 솟은 땀도 들이는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내 영원은.
동천, 민중서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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