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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꽃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5.

 서정주 시인 / 꽃

 

 

가신 이들의 헐떡이는 숨결로

곱게 곱게 씻기운 꽃이 피었다.

 

흐트러진 머리털 그냥 그대로,

그 몸짓 그 음성 그냥 그대로,

옛 사람의 노래는 여기 있어라.

 

오― 그 기름 묻은 머리빡 낱낱이 더워

땀 흘리고 간 옛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하늘 위에 있어라.

 

쉬어 가자 벗이여 쉬어서 가자

여기 새로 핀 크낙한 꽃그늘에

벗이여 우리도 쉬어서 가자

 

만나는 샘물마다 목을 축이며

이끼 낀 바윗돌에 턱을 고이고

자칫하면 다시 못 볼 하늘을 보자.

 

귀촉도, 정음사, 1948

 

 


 

 

서정주 시인 / 나그네의 꽃다발

 

 

내 어느 해던가 적적하여 못 견디어서

나그네 되어 호올로 산골을 헤매다가

스스로워 꺾어 모은 한 옹큼의 꽃다발―

그 꽃다발을 나는

어느 이름 모를 길가의 아이에게 주었느니.

 

그 이름 모를 길가의 아이는

지금쯤은 얼마나 커서

제 적적해 따 모은 꽃다발을

또 어떤 아이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그리고 몇십 년 뒤

이 꽃다발의 선사는 또 한 다리를 건네어서

내가 못 본 또 어떤 아이에게 전해질 것인가?

 

그리하여

천년이나 천오백 년이 지난 어느 날에도

비 오다가 개이는 산 변두리나

막막한 벌판의 해 어스름을

새 나그네의 손에는 여전히 꽃다발을 쥐이고

그걸 받을 아이는 오고 있을 것인가?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나의 시

 

 

어느 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친척의 부인을 모시고 성안 동백꽃나무 그늘에 와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 듯이 앉아 계시고, 나는 풀밭 위에 흥근한 낙화(落花)가 안쓰러워 주워 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 놓았습니다.

쉬임 없이 그 짓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 뒤 나는 년년(年年)히 서정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 꽃들을 주워다 드리던―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아줄 이가 땅 위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주워 모은 꽃들은 저절로 내 손에서 땅 위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 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서정주 시인 / 내가 돌이 되면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내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

삼천 사발의 냉숫물.

 

내 남루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내 영원은

 

 

내 영원은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가다 가단

후미진 굴헝이 있어,

소학교 때 내 여선생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이쁜 여선생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내려가선 혼자 호젓이 앉아

이마에 솟은 땀도 들이는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내 영원은.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