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침상(枕上)
그를 두고 옛날에는 시(詩)를 써 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머리맡에 조는 한밤의 램프여. 당시에 나는 그를 외로운 신부(新婦)라고 생각했다. 쓸쓸한 나의 자는 얼굴을 지켜주며 밤을 새우는. 그러나 이제 나는 단념했다. 나의 자는 얼굴을 지켜 줄 측은하게 어진 신부가 이 세상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고독은 그의 것. 나는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자다 깨다 혼자서 지낼 만큼 지내다 가는 것이다. 나의 베갯머리의 허전한 자리는 태어나는 그날부터 나의 것. 램프여, 누구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박목월 시인 / 크고 부드러운 손
크고 부드러운 손이 내게로 뻗쳐온다.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고 거득한 바다가 내게로 밀려온다. 인간의 종말이 이처럼 충만한 것임을 나는 미처 몰랐다. 허무의 저편에서 살아나는 팔. 치렁치렁한 성좌가 빛난다. 멀끔한 목 언저리쯤 가슴 언저리쯤 손가락 마디 마디마다 그것은 보석 그것은 눈짓의 신호 그것은 부활의 조짐 하얗게 삭은 뼈들이 살아나서 바람과 빛 속에서 풀잎처럼 수런거린다. 다섯 손가락마다 하얗게 떼를 지어서 맴도는 새. 날개와 울음. 치렁치렁한 성좌의 둘레 안에서.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박목월 시인 / 폐원(廢園)
그는 앉아서 그의 그림자가 앉아서
내가 피리를 부는데 실은 그의 흐느끼는 비오롱 솔로
눈이 오는데 옛날의 나직한 종이 우는데
아아 여기는 명동(明洞) 사원(寺院) 가까이
하얀 돌층계에 앉아서 추억의 조용한 그네 위에 앉아서
눈이 오는데 눈 속에 돌 층계가 잠드는데
눈이 오는데 눈 속에 여윈 장미 가난한 가지가 속삭이는데
옛날에 하고 내가 웃는데 하얀 길 위에 내가 우는데
옛날에 하고 그가 웃는데 서늘한 눈매가 이우는데
눈 위에 발자국이 곱게 남는다 망각의 먼 지평선이 저문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인 / 푸성귀
수질(水質) 좋은 경상도에, 연한 푸성귀 나와 나의 형제와 마디 고운 수너리반죽(斑竹). 사람 사는 세상에 완전낙토(完全樂土)야 있으랴마는 목기(木器) 같은 사투리에 푸짐한 시루떡. 처녀얘. 처녀얘. 통하는 처녀얘. 니 마음의 잔물결과 햇살싸라기.
-<경상도의 가랑잎>민중서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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