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눈 오시는 날
내 연인은 잠든 지 오래다. 아마 한 천년쯤 전에…….
그는 어디에서 자고 있는지, 그 꿈의 빛만을 나한테 보낸다.
분홍, 분홍, 연분홍, 분홍, 그 봄 꿈의 진달래꽃 빛깔들.
다홍, 다홍, 또 느티나무빛, 짙은 여름 꿈의 소리나는 빛깔들.
그리고 인제는 눈이 오누나……. 눈은 와서 내리 쌓이고, 우리는 제마다 뿔뿔이 혼자인데
아 내 곁에 누워 있는 여자여. 네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내 연인의 꿈은 또 한 번 비친다.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님은 주무시고
님은 주무시고, 나는 그의 베갯모에 하이옇게 수놓여 날으는 한 마리의 학이다.
그의 꿈 속의 붉은 보석들은 그의 꿈 속의 바닷속으로 하나 하나 떨어져 내리어 가라앉고
한 보석이 거기 가라앉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한 이별을 갖는다.
님이 자며 벗어 놓은 순금의 반지 그 가느다란 반지는 이미 내 하늘을 둘러 끼우고
그의 꿈을 고이는 그의 베갯모의 금실의 테두리 안으로 돌아오기 위해 나는 또 한 이별을 갖는다.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대낮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온몸이 달아……
* 핫슈: 아편의 종류.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서정주 시인 / 두 향나무 사이
두 향나무 사이, 걸린 해마냥 지, 징, 지, 따, 찡, 가슴아 인젠 무슨 금은(金銀)의 소리라도 해 보려무나.
내 각씨는 이미 물도 피도 아니라 마지막 꽃밭 증발하여 괴인 시퍼렇디 시퍼런 한 마지기 이내[嵐]!
간대도, 간대도, 서방(西方) 금색계(金色界)라든가 뭣이라든가 그런 데로밖엔 쏠릴 길조차 없으니.
가슴아. 가슴아. 너같이 말라 말라 광맥 앙상한 메마른 각씨를 오늘 아침엔 데리고 지, 징, 지, 따, 찡 무슨 금은(金銀)의 소리라도 해 보려무나.
신라초, 정음사, 1961
서정주 시인 / 멕시코에 와서
뱀하고 호랑이가 맞붙어 싸우다가, 뱀이 이겨서 해가 되시고, 호랑이가 져서 달이 된 나라.
참 괴짜인 나라. 이런 멕시코에 와서 살자면 낮에는 칭칭 동여감으며 밤에는 호식(虎食)도 잘 해 내야 할 텐데.
이것 여(余)는 뱀도 호랑이도 팔자엔 없어 지니고 온 피나 왁 왁 토하군 우선은 병원에 가 드러누워서 멕시코 사람 피나 꾸어 담으며 생리가 변할 날만 기다리고 있노라.
* 날개 돋친 뱀과 호랑이의 승부 이야기는 멕시코의 옛 신화에 있는 것으로, 멕시코 시에서 동북으로 51킬로미터의 교외에 나가면 테오티와칸―즉, 유적인 신의 도시 한쪽엔 아직 그 날개 돋친 뱀 케찰코아틀 신전이 남아 있다. D.H. 로렌스가 이 이름으로 소설을 쓴 것도 있다. 나는 이 멕시코 시에서 1978년 2월 11일 황혼, 내가 몸에 지닌 피의 45퍼센트를 객혈하고 병원에 입원하여 여기 사람의 피를 구해 수혈을 받았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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