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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눈 오시는 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6.

 서정주 시인 / 눈 오시는 날

 

 

내 연인은 잠든 지 오래다.

아마 한 천년쯤 전에…….

 

그는 어디에서 자고 있는지,

그 꿈의 빛만을 나한테 보낸다.

 

분홍, 분홍, 연분홍, 분홍,

그 봄 꿈의 진달래꽃 빛깔들.

 

다홍, 다홍, 또 느티나무빛,

짙은 여름 꿈의 소리나는 빛깔들.

 

그리고 인제는 눈이 오누나…….

눈은 와서 내리 쌓이고,

우리는 제마다 뿔뿔이 혼자인데

 

아 내 곁에 누워 있는 여자여.

네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내 연인의 꿈은 또 한 번 비친다.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님은 주무시고

 

 

님은

주무시고,

나는

그의 베갯모에

하이옇게 수놓여 날으는

한 마리의 학이다.

 

그의 꿈 속의 붉은 보석들은

그의 꿈 속의 바닷속으로

하나 하나 떨어져 내리어 가라앉고

 

한 보석이 거기 가라앉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한 이별을 갖는다.

 

님이 자며 벗어 놓은 순금의 반지

그 가느다란 반지는

이미 내 하늘을 둘러 끼우고

 

그의 꿈을 고이는

그의 베갯모의 금실의 테두리 안으로

돌아오기 위해

나는 또 한 이별을 갖는다.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대낮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온몸이 달아……

 

* 핫슈: 아편의 종류.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서정주 시인 / 두 향나무 사이

 

 

두 향나무 사이, 걸린 해마냥

지, 징, 지, 따, 찡,

가슴아

인젠 무슨 금은(金銀)의 소리라도 해 보려무나.

 

내 각씨는 이미 물도 피도 아니라

마지막 꽃밭 증발하여 괴인

시퍼렇디 시퍼런 한 마지기 이내[嵐]!

 

간대도, 간대도,

서방(西方) 금색계(金色界)라든가 뭣이라든가

그런 데로밖엔 쏠릴 길조차 없으니.

 

가슴아. 가슴아.

너같이 말라 말라 광맥 앙상한

메마른 각씨를 오늘 아침엔 데리고

지, 징, 지, 따, 찡

무슨 금은(金銀)의 소리라도 해 보려무나.

 

신라초, 정음사, 1961

 

 


 

 

서정주 시인 / 멕시코에 와서

 

 

뱀하고

호랑이가

맞붙어 싸우다가,

뱀이

이겨서

해가 되시고,

호랑이가 져서

달이 된 나라.

 

괴짜인 나라.

이런 멕시코에 와서 살자면

낮에는 칭칭 동여감으며

밤에는 호식(虎食)도 잘 해 내야 할 텐데.

 

이것

여(余)는

뱀도 호랑이도 팔자엔 없어

지니고 온 피나 왁 왁 토하군

우선은 병원에 가 드러누워서

멕시코 사람 피나 꾸어 담으며

생리가 변할 날만 기다리고 있노라.

 

* 날개 돋친 뱀과 호랑이의 승부 이야기는 멕시코의 옛 신화에 있는 것으로, 멕시코 시에서 동북으로 51킬로미터의 교외에 나가면 테오티와칸―즉, 유적인 신의 도시 한쪽엔 아직 그 날개 돋친 뱀 케찰코아틀 신전이 남아 있다. D.H. 로렌스가 이 이름으로 소설을 쓴 것도 있다. 나는 이 멕시코 시에서 1978년 2월 11일 황혼, 내가 몸에 지닌 피의 45퍼센트를 객혈하고 병원에 입원하여 여기 사람의 피를 구해 수혈을 받았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