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피지(皮紙)
낸들 아나. 목숨이 뭔지 이랑 짧은 돌밭머리 모진 뽕나무 아베요 어매요 받들어 모시고 피지(皮紙) 같은 얼굴들이 히죽히죽 웃는 경상남북도 가로질러 물을 모아 흐르는 낙동강.
-<경상도의 가랑잎>민중서관, 1968
박목월 시인 / 회귀심(回歸心)
어딜 가나, 나는 원효로행(元曉路行) 버스를 기다린다. 어디서나 나는 원효로행(元曉路行)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릴케의 시구(詩句)를 빌리면, 깊은 밤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누리 안에서 고독한 공간(空間)으로 혼자 떨어져 가는 그 땅덩이에서 나는 호구책(糊口策)을 마련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거리를 서성거렸고 때로는 사람을 방문(訪問)하고 외로운 친구와 더불어 잔(盞)을 나누고 밤이 되면 어디서나 나는 원효로행(元曉路行) 버스를 기다린다. 이 갸륵하고 측은한 회귀심(回歸心). 원효로(元曉路)에는 종점(終點) 가까이 가족(家族)이 있다. 서로 등을 붙이고 하룻밤을 지내는 측은한 화목(和睦)들. 어둑한 버스 안에서 나는 늘 마음이 가라앉았다. 릴케의 시구(詩句)를 빌리면, 이처럼 떨어지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받아 주시는 끝없이 부드러운 그 손을 내가 느끼기 때문이다.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박목월 시인 / 회전
자갈돌은 제자리에서 얼어붙고, 지구는 돌면서 밤이 된다. 검은 말을 몰고 달리는 것은 바람. 흰 말을 몰고 달리는 것은 하늘의 말몰이꾼. 그 방향에서 마른 번개는 치고 푸른 서치라이트에 떠오르는 것은 북극곰. 끓어오르는 바다의 빙산 위에서. 꺼져가는 것은 울부짖는 북극곰. 지구는 돌면서 밤이 되고 가볍게 뿌려진 것은 하늘의 은모래……. 큰곰자리의 성운. 자갈돌은 제자리에서 얼어붙고, 지구는 돌면서 밤이 된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효자동(孝子洞)
숨어서 한 철을 효자동(孝子洞)에서 살았다. 종점 근처(終點近處)의 쓸쓸한 하숙(下宿)집.
이른 아침에 일어나 꾀꼬리 울음을 듣기도 하고 간혹 성경(聖經)을 읽기도 했다. 마태복음(福音) 오장(五章)을, 고린도전서(前書) 십 삼장(十三章)을.
인왕산(人旺山)은 해 질 무렵이 좋았다. 보랏빛 산외(山巍) 어둠이 갈앉고 램프에 불을 켜면 등피(燈皮)에 흐릿한 무리가 잡혔다.
마음이 가난한 자(者)는 복(福)이 있나니 ……아아 그 말씀. 그 위로(慰勞). 그런 밤일수록 눈물은 베개를 적시고, 한밤중에 줄기찬 비가 왔다.
이제 두 번 생각하지 않으리라. 효자동(孝子洞)을 밤비를 그 기도(祈禱)를 아아 강물 같은 그 많은 눈물이 마른 하상(河床)에 달빛이 어리고
서글픈 평안(平安)이 끝없다.
난(蘭).기타(其他), 신구문화사,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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