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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몽블랑의 신화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7.

 서정주 시인 / 몽블랑의 신화

 

 

신부와 신랑이 겨울 몽블랑 산 속으로 신혼여행을 왔었는데요. 가파른 어느 낭떠러지에서 신랑이 실족하여 미끄러져 내려가 버린 것이 아무리 찾아 보아도 영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몽블랑의 산신녀가 그 신랑이 탐나서 그런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합지요만은…….

 

해가 바뀌도록 찾고 찾고 또 찾았지만 신랑의 모양은 어느 바위 틈에도, 흙 위에도, 냇물 속에도, 아무데도 나타나 보이질 않아, 신부는 할 수 없이 이 몽블랑 산골에 초막을 엮어 살며, 그를 찾아 기다리노라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다섯 해가 가고, 열 해가 가고, 여러 10년의 세월이 첩첩이 흘러서 드디어는 파뿌릿빛 머리털의 할마씨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초봄 산골의 눈녹이 때의 일인데요. 눈 녹은 물이 새로 흘러내리는 어느 골짜기의 개울가에서 신부는 그 물 속에 잠기어 떠내려오고 있는 그네의 신랑을 겨우 다시 보게는 됐는데, 그건 하도나 오랜만이라서 숨결이사 날아간 지 오래였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이나 머리털이나 살결의 젊음은 그때 신혼 때 그대로더라구요.

 

몽블랑 산의 중턱부터 위에는 일년 내내 눈이 덮여 꽁꽁 얼어 있으니, 신랑은 그 어디 바위 사이에 걸려 냉장(冷藏)되어 있다가, 여러 10년 만의 이상난춘(異常暖春)의 드문 기온에 풀려 흘러내려온 것이리라고, 사람들은 말씀을 하기도 하고, 또 `아닐 거다. 그건 몽블랑의 산신녀의 짓일 것이다'고 하기도 합지요만은…….

 

* 스위스와의 국경 가까이 있는 프랑스의 몽블랑 산맥의 산봉은 4천 몇백 미터 되는 것으로, 그 3천 몇백까지는 케이블카가 오르내리고 있다. 이곳 산골들은 아주 한가하고 고요하고 깨끗해서, 우리나라 청년 하나도 한동안 여기 살며 산을 타다가 연전에 조난당해 불귀의 객이 되기도 했다. 이 시에서 다룬 이야기는 이 산골의 구전의 전설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무제 -1-

 

 

여기는 어쩌면 지극히 꽝꽝하고 못 견디게 새파란 바위 속일 것이다. 날센 쟁깃날로도 갈고 갈 수 없는 새파란 새파란 바위 속일 것이다.

 

여기는 어쩌면 하늘나라일 것이다. 연한 풀밭에 베짱이도 우는 서러운 서러운 시골일 것이다.

 

아 여기는 대체 몇만리이냐. 산과 바다의 몇만리이냐. 팍팍해서 못 가겠는 몇만리이냐.

 

여기는 어쩌면 꿈이다. 귀비(貴妃)의 묘 등 앞에 막걸리집도 있는 어여쁘디 어여쁜 꿈이다.

 

귀촉도, 정음사, 1948

 

 


 

 

서정주 시인 / 무제 -2-

 

 

매가

꿩의 일로서

울던 데를 이야기할 테니

우리나라 수(繡)실로

마누라 보고 베갯모에 수(繡)놓아 달래서

베고 쉬게나.

눈물을 아주 잘 수(繡)놓아 달래서

베고 쉬게나.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밀어(密語)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리ㄹ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차일을 물은 듯, 아늑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귀촉도, 정음사, 1948

 

 


 

 

서정주 시인 / 박용래

 

 

아내와 아이들 다 직장에 나가는

밝은 낮은 홀로 남아 시 쓰며 빈집 지키고

해 어스름 겨우 풀려 친구 만나러 나온다는

박용래더러 `장 속의 새로다' 하니,

그렇기사 하기는 하지만서두 지혜는 있는 새라고 한다.

요렇처럼 어렵사리 만나러도 나왔으니,

지혜는 있는 새지 뭣이냐 한다.

왜 아니리요.

대한민국에서

그중 지혜 있는 장 속의 시(詩)의 새는

아무래도 우리 박용래인가 하노라.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서정주 시인 / 백일홍 필 무렵

 

 

주춧돌이 하나 녹아서

환장한 구름이 되어서

동구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지.

칠월이어서 보름나마 굶어서

백일홍이 피어서

밥상 받은 아이같이 너무 좋아서

비석 옆에 잠시 서서 웃고 있었지.

다듬잇돌도

또 하나 녹아서

동구로 떠나오는 구름이 되어서…….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