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몽블랑의 신화
신부와 신랑이 겨울 몽블랑 산 속으로 신혼여행을 왔었는데요. 가파른 어느 낭떠러지에서 신랑이 실족하여 미끄러져 내려가 버린 것이 아무리 찾아 보아도 영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몽블랑의 산신녀가 그 신랑이 탐나서 그런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합지요만은…….
해가 바뀌도록 찾고 찾고 또 찾았지만 신랑의 모양은 어느 바위 틈에도, 흙 위에도, 냇물 속에도, 아무데도 나타나 보이질 않아, 신부는 할 수 없이 이 몽블랑 산골에 초막을 엮어 살며, 그를 찾아 기다리노라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다섯 해가 가고, 열 해가 가고, 여러 10년의 세월이 첩첩이 흘러서 드디어는 파뿌릿빛 머리털의 할마씨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초봄 산골의 눈녹이 때의 일인데요. 눈 녹은 물이 새로 흘러내리는 어느 골짜기의 개울가에서 신부는 그 물 속에 잠기어 떠내려오고 있는 그네의 신랑을 겨우 다시 보게는 됐는데, 그건 하도나 오랜만이라서 숨결이사 날아간 지 오래였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이나 머리털이나 살결의 젊음은 그때 신혼 때 그대로더라구요.
몽블랑 산의 중턱부터 위에는 일년 내내 눈이 덮여 꽁꽁 얼어 있으니, 신랑은 그 어디 바위 사이에 걸려 냉장(冷藏)되어 있다가, 여러 10년 만의 이상난춘(異常暖春)의 드문 기온에 풀려 흘러내려온 것이리라고, 사람들은 말씀을 하기도 하고, 또 `아닐 거다. 그건 몽블랑의 산신녀의 짓일 것이다'고 하기도 합지요만은…….
* 스위스와의 국경 가까이 있는 프랑스의 몽블랑 산맥의 산봉은 4천 몇백 미터 되는 것으로, 그 3천 몇백까지는 케이블카가 오르내리고 있다. 이곳 산골들은 아주 한가하고 고요하고 깨끗해서, 우리나라 청년 하나도 한동안 여기 살며 산을 타다가 연전에 조난당해 불귀의 객이 되기도 했다. 이 시에서 다룬 이야기는 이 산골의 구전의 전설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무제 -1-
여기는 어쩌면 지극히 꽝꽝하고 못 견디게 새파란 바위 속일 것이다. 날센 쟁깃날로도 갈고 갈 수 없는 새파란 새파란 바위 속일 것이다.
여기는 어쩌면 하늘나라일 것이다. 연한 풀밭에 베짱이도 우는 서러운 서러운 시골일 것이다.
아 여기는 대체 몇만리이냐. 산과 바다의 몇만리이냐. 팍팍해서 못 가겠는 몇만리이냐.
여기는 어쩌면 꿈이다. 귀비(貴妃)의 묘 등 앞에 막걸리집도 있는 어여쁘디 어여쁜 꿈이다.
귀촉도, 정음사, 1948
서정주 시인 / 무제 -2-
매가 꿩의 일로서 울던 데를 이야기할 테니 우리나라 수(繡)실로 마누라 보고 베갯모에 수(繡)놓아 달래서 베고 쉬게나. 눈물을 아주 잘 수(繡)놓아 달래서 베고 쉬게나.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밀어(密語)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리ㄹ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차일을 물은 듯, 아늑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귀촉도, 정음사, 1948
서정주 시인 / 박용래
아내와 아이들 다 직장에 나가는 밝은 낮은 홀로 남아 시 쓰며 빈집 지키고 해 어스름 겨우 풀려 친구 만나러 나온다는 박용래더러 `장 속의 새로다' 하니, 그렇기사 하기는 하지만서두 지혜는 있는 새라고 한다. 요렇처럼 어렵사리 만나러도 나왔으니, 지혜는 있는 새지 뭣이냐 한다. 왜 아니리요. 대한민국에서 그중 지혜 있는 장 속의 시(詩)의 새는 아무래도 우리 박용래인가 하노라.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서정주 시인 / 백일홍 필 무렵
주춧돌이 하나 녹아서 환장한 구름이 되어서 동구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지. 칠월이어서 보름나마 굶어서 백일홍이 피어서 밥상 받은 아이같이 너무 좋아서 비석 옆에 잠시 서서 웃고 있었지. 다듬잇돌도 또 하나 녹아서 동구로 떠나오는 구름이 되어서…….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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