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순 시인 / 한잔 술
나그네 주인(主人)이여 평안하신고 곁에 앉힌 술단지 그럴 법 허이 한잔 가득 부어서 이리 보내게 한잔 한잔 또 한잔 저 달 마시자 오늘 해도 저물고 갈 길은 머네 꿈 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主人)이여 이거 어인 일 한잔 한잔 또 한잔 끝도 없거니 심산유곡(深山幽谷) 옥천(玉泉)샘에 홈을 대었나 지하(地下) 천척(千尺) 수맥(水脈)에 줄기를 쳤나 바다는 말릴망정 이 술단지사 꿈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主人)이여 좋기도 허이 수양(垂楊)은 말이 없고 달이 둥근데 한잔 한잔 또 한잔 채우는 마음 한잔 한잔 또 한잔 비우는 마음 길가에 펴난 꽃아 설어를 말아 꿈 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主人)이여 한잔 더 치게 한잔 한잔 또 한잔 한잔이 한잔 한잔 한잔 또 한잔 석잔이 한잔 아홉잔도 또 한잔 한잔 한없어 한없는 잔이언만 한잔에 차네 꿈 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主人)이여 설기도 허이 속깊은 이 한잔을 누구와 마셔 동해(東海)바다 다 켜도 시원치 않을 끝없는 나그넷길 한(恨)깊은 설움 꿈인양 달래보는 하염없는 잔 꿈 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시인 / 항아리 부제: 항아리와 더불어 삶의 꿈을 어루만지는 조선여인(朝鮮女人)의 마음
조선(朝鮮)의 하늘빛과 젖빛 구름과 그윽한 고령토(高靈土)와 조선(朝鮮)의 꿈과 창공(蒼空)에 물결치며 달리는 산맥(山脈) 대지(大地)에 구비치며 흐르는 장강(長江)
춘하추동사시(春夏秋冬四時)의 눈부신 조화(調和) 찬란한 일월성신(日月星辰) 우렁찬 선율(旋律)
이 자연(自然)이 조화(造化)의 맥박(脈搏)과 호흡(呼吸) 길이 스며 흐른다 조선(朝鮮) 항아리
하늘빛 모시치마 허리에 감고 이슬맺는 달밤에 호올로 서서 너를 어루만지는 나의 속마음 살뜰히 씻는 내 맘 너는 알리라
이내 마음 허전해 어루만지고 답답고 서글퍼도 어루만지고 우울하고 서러도 어루만지고 외롭고 쓸쓸해도 어루만지고
심심코 무료해도 어루만지고 내 영혼(靈魂) 적막해도 어루만지고 이내 마음 꽉 차도 어루만지고 이내 마음 텅벼도 어루만지고
회의(懷疑)에 잠기어도 어루만지고 감정(感情)이 격동해도 어루만지고 감각(感覺)이 가란져도 어루만지고 신경(神經)이 날카뤄도 어루만지고
둥그런 수박 같은 빛난 흙그릇 길게 흐른 유선형(流線形) 예술(藝術)은 길어 항아리는 백(百)하나 장엄(壯嚴)도할사 황금보옥(寶玉) 일없네 그건 죽은 것 항아리는 내 분신(分身) 호흡(呼吸)이 통(通)해
찼다 볐다 자유(自由)다 내 마음따라 있다 없다 자재(自在)다 나의 뜻대로 차면 차고 비면 벼 내 멋의 창조(創造) 꽃과 달을 배우는 경건(敬虔)한 도장(道場)
후원(後園)의 장독단(壇)은 내 꿈의 제단(祭壇) 좋아서 설은 생명(生命) 호소(呼訴)의 법정(法庭) 짧고 긴 내 살림의 의욕(意慾)의 비고(秘庫) 크고 작고 나란히 내 맘의 질서(秩序)
길고 둥근 흙그릇 단장(丹粧)한 그 멋 고려자기청자기(高麗磁器靑磁器) 표묘한 신운(神韻) 이조자기백자기(李朝磁器白磁器) 침잠(沈潛)한 아담(雅淡) 매란국죽사군자(梅蘭菊竹四君子) 향기(香氣)도 높고 사슴거북십장생(十長生) 기품(氣品)도 좋아 인생(人生)과자연귀일(自然歸一) 조화(調和)의 극지(極地)
흙으로 빚인 네 몸 약간 다쳐도 생동(生動)하는 숨결이 멎어지려니 문명역사(文明歷史) 자랑는 인간(人間)의 몸도 흙으로 빚어내진 전설(傳說) 슬프다
내 키 커도 다섯 자 진정 서글퍼 네 키 커도 다섯 자 너도 그러리 무한(無限)을 한정(限定)한양 너와 내 신세(身勢) 영원(永遠)을 주름잡은 나와 네 입체(立體) 사람 손에 빚어낸 너의 존재(存在)나 너에게 손은 없되 쥘 자리 있어 내 손에 쥐어지고 어루만져져 가만히 서고 앉아 내 사랑 받네
선정(禪定)에 든 네 모양 나는 애달퍼 명상(瞑想)에 깊이 든 잠 깨워 보련다
발돋움하여 볼까 누가 더 큰가 나의 발은 자유(自由)나 너는 선뱅이 나는 굴신자재(屈伸自在)나 너는 어이 해
자연생명(自然生命) 네 속에 스며 흐르고 천재영혼(天才靈魂) 네 속에 아득히 동(動)해 뚜렷한 너의 성격(性格) 손에 잡히고 안 뵈는 네 발돋음 심안(心眼)에 비쳐 수집은 네 속삭임 귀 속에 아련 소리없는 네 미소(微笑) 황홀(恍惚)도 하다
춘풍추우사시절(春風秋雨四時節) 씻고 또 씻고 일광월광운영(日光月光雲影) 속 채우고 비고 이슬 서리 비 눈에 다채(多彩)한 표정(表情) 유풍(裕豊)한 네 살림의 왕성(旺盛)한 의욕(意慾) 달밤에 꾸는 네 꿈 설은 에로쓰
일편단심(一片丹心) 내 사랑 알뜰한 사랑 병들어 여윈 때도 너를 못 잊어 옥천(玉泉)샘 정안수(淨安水)로 채우고 비고 성체(聖體)같은 네 몸에 부정(不淨)이 탈까 어루만져 씻고사 이 맘 놓이네
여기 고초장단지 저기 간장독 장아찌 꿀항아리 게장굴단지 김치깍두기단지 국화(菊花)술단지 옹기종기 늘어서 백화(百花)로 요란 철철이 때 따라서 미각(味覺)을 꾀어 가족생리영리(家族生理靈理)의 생장(生長)을 돕고 생일(生日)잔치 돐잔치 신명(神明)께 빌고 명절경절축하(名節慶節祝賀)로 장만한 여유(餘裕) 일가친척(一家親戚) 이웃에 나누어 먹고 정성(淨誠)을 다 한 제주(祭酒) 고이 빚어서 조상(祖上)의 봉제사(奉祭祀)날 손 꼽아 고대
항아리 속이 비면 내 마음 비고 항아리 속이 차면 내 마음 차네 항아리 속이 차면 내 마음 비고 항아리 속이 비면 내 마음차 네
빈 마음 찬 것 비어 빈 맘 채우고 찬 마음 빈 것 채워 찬 맘 비우니 항아리와 나와는 순환인과율(循環因果律) 쪼갤 수 없는 운수(運數) 예정(豫定)의 조화(調和)
빈 속 에 무(無)가 숨어 유(有)를 꼬이고 찬 속에 유(有) 못 견뎌 무(無)를 부르네 유무(有無)의 숨바꼭질 끝도 없거니 유무(有無)의 끝나는 곳 열반적멸궁(涅槃寂滅宮)
적멸궁(寂滅宮)에 가는 길 하도 멀기에 시공(時空)을 주름잡은 곡선(曲線)항아리 가슴 속 은하수(銀河水)에 오작교(烏鵲橋) 놓아 견우직녀(牽牛織女) 만나듯 영혼(靈魂)을 꾀어 적멸궁(寂滅宮) 우리 님을 저 피안(彼岸)인양 차안방촌(此岸方寸)에 뵈는 필로소피아
항아리의 아득한 설은 에로쓰 구원(久遠)의 길동무냥 손을 이끌고 모르고도 아는 길 뵈는 항아리 어루만져 씻는 맘 너는 아리라 채우고 비는 마음 너는 아리라
항아리 어루만져 세사(世事)를 잊고 항아리 거문고 타 내 꿈 달래네 달래도 또 달래도 깊어만가는 끝없는 이내 꿈은 단지에 어려 보고 보고 또 봐도 또 보고지고 자 세치 항아리의 끝없는 곡선(曲線) 아지 못 할 사이에 넋을 꼬이어
어깨춤 절로 나고 노래 제절로 아득한 아리랑재 넘겨주는 듯 거문고 가야금줄 타지 않건만 용궁월궁악사(龍宮月宮樂師)들 반주(伴奏)하누나 그윽고 신비(神秘)할사 흙그릇 조화(造化) 진선미성(眞善美聖)의 향연(饗宴) 천래(天來)의 소식(消息)
네 꿈이 내 꿈인가 내 꿈 네 꿈가 내 꿈이 항아린가 네 꿈 내 꿈가 내 꿈이 스며들어 네 꿈 빼앗고 네 꿈이 밀려들어 내 꿈 뺏으니 꿈과 꿈 교류융합(交流融合) 분간(分間)없고녀
꿈과 꿈의 심판자(審判者) 두 꿈 밖의 꿈 꿈 밖의 꿈 꿈 속 꿈 깨임 없는 꿈 깸 없으니 무(無)의 꿈 이 꿈 참 꿈가 두어라 꿈타령(打鈴)은 끝도 없거니 영원(永遠)히 애태우는 속 모를 이 꿈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상순 시인 / 해바라기 외 1편 (0) | 2020.02.18 |
---|---|
서정주 시인 / 몽블랑의 신화 외 5편 (0) | 2020.02.17 |
박목월 시인 / 피지(皮紙) 외 3편 (0) | 2020.02.17 |
서정주 시인 / 눈 오시는 날 외 4편 (0) | 2020.02.16 |
오상순 시인 / 표류(表流)와 저류(底流)의 교차점 외 1편 (0) | 2020.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