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 시인 / 객지에서 소를 보면
객지에서 소를 보면 고향이 반갑다. 의젓한 뿔을 들고 말이 없는 소. 세상사 쓴맛 단맛을 반추하면서 소는 소대로 제 고향 꿈을 꾼다.
한때는 사하라 사막과 나일 강을 아래로 아득히 내려다보며 소가 하늘을 낳기도 했고, 언젠가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넘쳐 흐르는 강변을 오가던 소가 해로 인해서 사람을 밴 일도 있지.
염라대왕의 심부름군으로 이승에서 끝장난 인간의 혼을 잡아들이러 가기도 했다. 하늘은 아버지, 황소라 부르고 땅은 어머니, 암소라 해서 소를 안 잡는 자손들도 있다.
칠월 칠석 날이면 열 두 달 애타게 기다리다가 베 짜는 아가씨 만나는 목동을 우쭐우쭐 오작교로 데려가려고 지금도 은하 가까이 별을 셀까.
내내 남을 위해 살아온 역사. 지금은 명예 대신 멍에를 쓰고 부지런히 순하게 온갖 막일을 한다. 쓸개에 병으로 생기는 덩어리까지도 사람이 먹고서 좋다는구나.
끔벅이는 눈에 생각이 깊다. 찔끔찔끔 눈물 속으로 길 잃은 송아지 울음 메아리칠 때 혹은 그 참기만 한 통곡이 맴돌 때에 코뚜레 둥그렇게 우주가 도는가.
때로는 뿔을 써라, 힘센 소야. 논밭에도 도둑이 들거든 떠받아라. 버드나무 미루나무 우거진 사이 전쟁의 먹구름 덮거든 떠받아라.
고삐 풀고 코뚜레도 빼내고 이슬길에 저녁놀에 소 고향 사람 고향 같이 살자. ―객지에서 소처럼 일을 하다가 소를 보면 문득 고향이 반갑다. ―객지에서 소처럼 일을 하다가 소를 보면 문득 고향이 반갑다.
물너울, 창작과비평사, 1985
고원 시인 / 검은 눈물로 거듭나
Ⅰ
여인은 휘청거리고 있었다. 제 다리에 겁이 났다. 그러자 갑자기 아찔하게 눈앞이 깜깜해진 한 순간 번쩍 새까만 것이 손에 잡혔다. 당장 여인의 손이 새까매졌다.
온 세상이 정녕 온 세상이 검은 색으로만 보였다. 여인의 맘도 새까맣게 숯이 되고 있었다. 가슴 속에 석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그저 까만 색으로 까만 색을 더, 더 새까맣게 먹칠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도 까맣게 새까맣게 타고 싶었다.
Ⅱ
한 여자가 한 여자의 한 많은 세상을 겨누고 있었다. 그러자니까 한국 여성의 모든 한을 겨누고 있었다.
이민이라는 살림을, 이민이라는 이름을, 한국과 미국 이중 국적을, 한국말도 미국말도 못하는 저 어디론지 잃어버리고 만 말 자체를, 이래저래 하나님 원망하는 자신의 원망을, 그 많은 검정 빛깔을 까맣게 새까맣게 겨누고만 있었다.
번쩍번쩍 지나가는 순간 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을 허망을 허공을 뜻도 없이 멋도 없이 그냥 겨누고만 있는 순간, 여자 스스로 불에 타고 있었다.
Ⅲ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3․8구경 권총, 이게 무슨 짓인가. 아무도 모르게 아뿔사, 깜빡 사이에 총알이 나갔다. 총알이 누군가를 뚫고 말았다.
총을 들어 십계명 어기고 자신의 기도도 어기고 열 다섯 살 검은 소녀 라타샤를 쓰러뜨린 지금은 검게 불타는 손이 제 가슴을 찢고 있었다.
피를 보고 싶었다. 새까만 피를 철철 흘리고 싶었다. 엘리 엘리 여인은 자기도 쓰러져서 십자가도 안 보이게 검은 피만 끝없이 흘리고 싶었다.
Ⅳ
"안 돼요. 이건 안 돼요 집행유예 안 돼요. 나 하나 죄인 하나 살려 놓고 흑인 한인 다 죽으면 안 돼요, 안 돼요."
"가야지요, 가야지요. 안 왔어야 할 데를 택해서 온 죄인 용서 없이 가야 해요."
"그런데 이게 온 세상이 웬일인가요. 내 인생 웬일인가요."
Ⅴ
잘못이었다. 모든 일이 잘못이었다. 그런데도 서울서 온 여인은 어느 날 거듭나고 있었다.
거듭나는 `두' 여인은 둘이 하나가 되는 새 언덕에 서야만 했다. 한인도 흑인도 아닌 지금은 `코리안 블랙' 한 사람, 흑인 아버지에게 태어난 한국 아이보다도 더 고운 검은 빛깔로 검은 빛 아름답게 거듭나는 여자.
검은 곰의 후손이 검은 머리 검은 치마 `코리안 블랙'으로 거듭나서 살 사람, 거듭나고자 여인이 운다. 검은 눈물로 검은 눈물로 빌면서 혼이 운다.
다시 만날 때, 범우사, 1993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상순 시인 / 환상(幻像) (0) | 2020.02.19 |
---|---|
서정주 시인 / 보릿고개 외 5편 (0) | 2020.02.18 |
오상순 시인 / 해바라기 외 1편 (0) | 2020.02.18 |
서정주 시인 / 몽블랑의 신화 외 5편 (0) | 2020.02.17 |
오상순 시인 / 한잔 술 외 1편 (0) | 2020.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