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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보릿고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8.

 서정주 시인 / 보릿고개

 

 

사월 초파일 뻐꾹새 새로 울어

물든 청보리

깎인 수정같이 마른 네 몸에

오슬한 비취의 그리메를 드리우더니

 

어느만큼 갔느냐, 굶주리어 간 아이.

 

오월 단오는

네 발바닥 빛깔로 보리는 익어

우리 가슴마다 그 까슬한 가시라기를 비비는데…….

 

뻐꾹새 소리도 고추장 다 되어

창자에 배는데…….

문드러진 손톱 발톱 끝까지

얼얼히 배는데…….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부활

 

 

내 너를 찾아왔다……유나(臾娜).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냐. 유나(臾娜), 이것이 몇만 시간 만이냐. 그날 꽃상부 산(山)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 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 오고…… 촉(燭)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천 린지, 한 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주소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아 유나(臾娜)! 유나(臾娜)! 유나(臾娜)!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서정주 시인 / 비엔나

 

 

비엔나의 중년신사는 아직도 중절모를 쓰고

허리 굽혀 인사를 정중히 하지.

나 같은 코리안을 즈이 집에 맞이할 때는

태극기를 꺼내어 깨끗이 꽂고

자기 마누라까지 믿고서 맡겨 주시지.

 

비엔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돈이 약간은 모자라더래도

에누리로 또 그냥 받아도 주고,

그래, 그래, 머리빗도 비엔나 껏은

그 끝이 안 날카로워 아프지 않고,

 

푸른 다뉴브강의 그 강물빛은

사실은 구중충히 흐린 거지만

첼로에 맞춰서 노래부를 땐

거짓말로 아주 그만 푸른 걸로 해

정말보다 거짓말이 낫게 만들지.

 

그래서 신경질의 악성 베토벤도

이 수수한 여기가 마음 편안해

객지에 무덤으로까지 남아 있는 중이지.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사경(四更)

 

 

이 고요에

묻은

나의 손때를

 

누군가

소리 없이

씻어 헤우고

 

그 씻긴 자리

새로

벙그는

 

새벽

지샐 녘

난초 한 송이.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상가수(上歌手)의 소리

 

 

질마재 상가수(上歌手)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상가수(上歌手)는 뒤깐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 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 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명경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 좋게 밀어 넣어 올리는 쇠뿔 염발질을 점잔하게 하고 있어요.

 

명경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상파울루의 히피 시장 유감(有感)

 

 

브라질에서 제일 싼 소가죽으로

브라질에서 제일 싼 한국 사람이

브라질에서 제일 이쁜 가방을 만들어 놓고,

눈물 때문인가, 그보다도 또 더한 무엇 때문인가,

아주 검은 안경으로 두 눈을 가리고

상파울루 히피 시장에서 서서 팔고 있음이여!

하필이면 이 세계의 늙은 떠돌이―내가

또 그걸 사서 등에다 걸머지고

더 먼 길로 떠나가고 있음이여!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