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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상순 시인 / 환상(幻像)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9.

오상순 시인 / 환상(幻像)

부제: 서울 명동(明洞) 모나리자 다방(茶房)에서

송숙군(宋琡君)의 추억하는 애화(哀話)를 듣고

 

 

분명(分明)코 글라디올라스이었는데

글라디올라스는 홀연(忽然) 간 곳 없고

오마!

 

언니!

언니!

 

어느듯 십년(十年)의 세월(歲月)이 흘러간

그윽하고 향기(香氣)로운

죽은 언니의 완연(宛然)한 그 모습 어인 일고―

오마!

글라디올라스!

글라디올라스!

 

눈을 닦고 다시 본 다음 순간(瞬間) ― 본연(本然)의 풍광(風光)!

 

미(美)의 화신(化身)인양 그림도 잘 하고 또 도취(陶醉)하던 우리 언니!

언니가 세상(世上)을 떠나던 바로 직전(直前)

꽃 피는 이팔(二八) 소녀시절(少女時節)의 나

메어질 듯 두근거리는 벅찬 가슴 어루만지며

금방 활짝 펴난 싱싱하고 향기(香氣) 풍기는

핏빛인양 새빨간 글라디올라스 한 가지

조심 조심 손에 들고―

 

오랜 동안 병(病)들어 누워 있는

병실(病室) 문을 정숙(靜肅)히 밀고 들어서며

약(弱)한 신경(神經) 놀랄세라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순간(瞬間)

 

그윽히 다가오는 엄(嚴)한 죽엄의 발자욱 소리에 귀를 기울인 듯

쌀쌀한 흰 침대(寢臺) 위에 주검같이 고요히 누운 채

창백(蒼白)히 여윈 고운 얼굴에

차차로 물들어 올라 홍조(紅潮) 띠우며

글라디올라스와 나 번갈아 응시(凝視)하며

갖난애기의 첫웃음과도 같은 알 수 없는그윽한

그러나 교교(交交)한 만감(萬感)이 미소(微笑) 띠우다가

어느덧 죽엄의 그늘 어린 울음과도 같은 표정(表情)으로 변(變)하며

 

늦여름 밤

풀잎에 맺힌 진주(眞珠)알 같은 흰 이슬 방울

달빛 먹음고 구을러 떨어지는 듯

힘없이 빛나는 검푸른 눈에 맺힌

난데없는 하얀 눈물 방울

어느덧 홍조(紅潮) 띠운 여윈 뺨을 구을러 희 벼개 위에 떨어지던

그 모습!

그 얼굴!

그 표정(表情)!

오― 그 표정(表情)!

 

그때와도 같은 중복(中伏) 허리

찌는 듯이 무더운 칠월(七月) 하늘

오후(午後)의 한나절 지금 이 순간(瞬間)―-

정적(靜寂)한 나의 서재(書齋) 책상(冊床) 위에

아담(雅淡)한 이조백자(李朝白磁) 흰 화병(花甁)에 고이 핀 한 떨기 새빨간 글라디올라스 위에

그 속에 그 밖에 바로 그때 그 모습! 그 얼굴! 그 표정(表情)! 오오, 그 표정(表情)!

꿈인 듯 기적(奇蹟)인양 어린고요!

 

갑자기 패연(沛然)히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에

서재(書齋) 창문(窓門) 활짝 열어 제치니

비에 젖은 일진(一陣) 양풍(凉風)은

글라디올라스 빛갈과도 같이

알 수 없는 꿈과 놀라움과 안타까움과 흥분(興奮)에

홍조(紅潮) 띠운 나의 얼굴을 스쳐가노메라.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吳相淳, 1894.8.9 ~ 1963.6.3] 시인

1894년 서울에서 출생. 호는 공초(空超). .1906년 경신 학교(儆新學校) 졸업. 1918년 도시샤(同志社) 대학 종교철학과 졸업. 1920년 김억(金億), 남궁벽(南宮壁),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 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폐허》의 동인으로 그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24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 중앙 학림(동국 대학교의 전신) 교수 역임.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과 대통령상 등을 수상. 1963년 지병으로 사망. 주요작품으로 「한잔술」, 「첫날밤」, 「방랑의 마음」,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낙엽」 등이 다수 있음. 저서로는 死後 발간된  《오상순 시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