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서반아(西班牙)의 가가대소(呵呵大笑) 부제: 『돈키호테』의 작자 세르반테스의 고택(故宅) 옆 골목에서 들은바
고요하고 잔잔한 한국 미소보다야 상품(上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서두 서반아의 가가대소(呵呵大笑)라는 것도 들어 볼수록 한 맛은 있더군.
`중세 천년의 팔도 수호 명목의 갑옷 입고 창칼 든 정의의 기사 고것들은 고 을마나 웃기는 거였냐? 병신들 지랄했네! 돈키호테가 차라리 훨씬 좋겠다. 가가가가(呵呵呵呵)! 가가가(呵呵呵)!'
`이차대전이니 뭐니 뭐니 하는 건 또 그 을마나 육시(六屍) 팥밥이었냐? 발 싸악 씻고 들어앉아서 우리는 거저 구경이나 했노라. 불쐬주(酒)에 훌라멩고 춤이나 추시며 넌지시 멀찍이서 구경이나 했노라. 우리가 못났냐?! 어?! 우리가 못났어?! 잡것들 지랄 마라. 가가가가(呵呵呵呵) 가가가(呵呵呵)!'
`말씀이사 바루 말씀이지만 싸움이사 우리가 먼저 선수들로서 남아메리카 전부를 도살장도 만들었다만 그게 뭐였냐? 그따윗 즛이 뭐였어? 인디오건 깜둥이건 마구 쑤셔서 모레노의 깡패들, 모레나의 창녀들, 그런 거나 구석구석 까 퍼뜨려 놓았네! 아이구 하누님 마시옵소사 그 따위 낭비는 죽어도 인젠 다시는 안 해야지. 가가가가가가가(呵呵呵呵呵呵呵)! 가가가가가가가(呵呵呵呵呵呵呵)!'
`이십세기의 대유행 동족상잔 같은 것도 우리가 일찍이 1930년대에 뻔보이기로 해보기사 했지만서두 행여나 너무 나삔 보지 말아라. 알아주건 말건 맘대로 하게마는, 우리 푸랑코와 인민전선파의 혈전 그것은 순수 스페인적인 조끔 과한 스포츠에 불과했었네. 아닌가 긴가 공동묘지에 가 보렴. 푸랑코는 죽을 때 유언한 대로 인민전선파들하고 한 묘지에 가 묻혔노라. 영원히 나란히 의좋게 묻혔노라. 원수가 따로 없네 잉? 가가가가가가가(呵呵呵呵呵呵呵)! 가가가가가가가(呵呵呵呵呵呵呵)! 가가가가(呵呵呵呵) 가가가가(呵呵呵呵) 가가가가(呵呵呵呵) 가가가(呵呵呵)!'
* 이 시의 제3연에 보이는 `육시(六屍) 팥밥'이라는 것은 우리 이왕조 때의 사형의 일종인 육시형(六屍刑), 즉 인신을 사지와 머리와 동체(胴體) 여섯 구분으로 찢어죽이는 형(刑) 시행 직전에 그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먹여주던 `팥밥' 그것이다. 제4연에 보이는 스페인말 `인디오'는 인디언이라는 뜻이고, 모레노는 백인과 흑인 또는 인디오 사이의 혼혈남이고, 모레나는 또 그 혼혈녀이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연에 보이는 푸랑코와 그 적이었던 인민전선파의 공동의 묘지는 물론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서풍부(西風賦)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오갈피 상나무와 개가죽 방구와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무상무
노루야 암노루야 홰냥노루야 늬 발톱에 상채기와 퉁수 소리와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한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과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서정주 시인 / 석녀(石女) 한물댁의 한숨
아이를 낳지 못해 자진해서 남편에게 소실을 얻어 주고, 언덕 위 솔밭 옆에 홀로 살던 한물댁은 물이 많아서 붙여졌을 것인 한물이란 그네 친정 마을의 이름과는 또 달리 무척은 차지고 단단하게 살찐 옥같이 생긴 여인이었습니다. 질마재 마을 여인들의 눈과 눈썹 이빨과 가르마 중에서는 그네 것이 그 중 단정하게 이쁜 것이라 했고, 힘도 또 그 중 아마 실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 바람 부는 날 그네가 그득한 옥수수 광우리를 머리에 이고 모시밭 사잇길을 지날 때, 모시 잎들이 바람에 그 흰 배때기를 뒤집어 보이며 파닥거리면 그것도 `한물댁 힘 때문이다.'고 마을 사람들은 웃으며 우겼습니다.
그네 얼굴에서는 언제나 소리도 없는 엣비식한 웃음만이 옥 속에서 핀 꽃같이 벙글어져 나와서 그 어려움으론 듯 그 쉬움으론 듯 그걸 보는 남녀노소들의 웃입술을 두루 위로 약간씩은 비끄러 올리게 하고, 그 속에 웃이빨들을 어쩔 수 없이 잠깐씩 드러내놓게 하는 막강한 힘을 가졌었기 때문에, 그걸 당하는 사람들은 힘에 겨워선지 그네의 그 웃음을 오래 보지는 못하고 이내 슬쩍 눈을 돌려 한눈들을 팔아야 했습니다. 사람들뿐 아니라, 개나 고양이도 보고는 그렇더라는 소문도 있어요. `한물댁같이 웃기고나 살아라.' 모두 그랬었지요.
그런데 그 웃음이 마흔 몇 살쯤 하여 무슨 지독한 열병이라던가로 세상을 뜨자, 마을에는 또 다른 소문 하나가 퍼져서 시방까지도 아직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한물댁이 한숨 쉬는 소리를 누가 들었다는 것인데, 그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어둔 밤도 궂은 날도 해 어스름도 아니고 아침 해가 마악 올라올락말락한 아주 밝고 밝은 어떤 새벽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네 집 한 치 뒷산의 마침 이는 솔바람 소리에 아주 썩 잘 포개어져서만 비로소 제대로 사운거리더라고요.
그래 시방도 밝은 아침에 이는 솔바람 소리가 들리면 마을 사람들은 말해 오고 있습니다. `하아 저런! 한몰댁이 일찌감치 일어나 한숨을 또 도맡아서 쉬시는구나! 오늘 하루도 그렁저렁 웃기는 웃고 지낼라는가부다.'고……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석류꽃
춘향이 눈썹 넘어 광한루 넘어 다홍치마 빛으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비 개인 아침 해에 가야금 소리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무주 남원 석류꽃을……
석류꽃은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구름 넘어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우리는 뜨내기 나무 기러기 소리도 없이 그 꽃가마 따르고 따르고 또 따르나니……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선덕여왕의 말씀
짐의 무덤은 푸른 영(嶺) 위의 욕계(欲界) 제이천(第二天).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터잡는데 ―그런 하늘 속.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너무들 인색치 말고 있는 사람은 병약자한테 시량(柴糧)도 더러 노느고 홀어미 홀아비들도 더러 찾아 위로코, 첨성대 위엔 첨성대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놔라.
살[肉體]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중 그 중 빛나는 황금 팔찌를 그 가슴 위에, 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 스러지지 않거든 다스리는 노래는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하지만 사랑이거든 그것이 참말로 사랑이거든 서라벌 천년의 지혜가 가꾼 국법보다도 국법의 불보다도 늘 항상 더 타고 있거라.
짐의 무덤은 푸른 영(嶺) 위의 욕계(欲界) 제이천(第二天).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터잡는 데―그런 하늘 속.
내 못 떠난다.
* 선덕여왕은 지귀(志鬼)라는 자의 여왕에 대한 짝사랑을 위로해, 그 누워 자는 데 가까이 가, 가슴에 그의 팔찌를 벗어 놓은 일이 있다.
신라초, 정음사,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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