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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고원 시인 / 달마당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0.

고원 시인 / 달마당

 

 

달 드는 뜨락

환한 정에

바람이 살살 빨려 들고

 

사람 가슴 비다 비다

아주 비면

푹 패어서

달 드는 마당.

 

다시 만날 때, 범우사, 1993

 

 


 

 

고원 시인 / 돌팔매

 

 

물새 발자욱 파묻힌 모래밭에

썼다 지웠다 짓궂은 회상(回想)을 묻으며

투명한 손에서 눈을 돌린다.

 

벌떡 일어나 돌팔매 또 돌팔매,

울분도 아닌 넋두리도 아닌

하나하나 버려야 할 나를 집어던지면,

파도의 으젓한 묵살(黙殺)이 좋구나.

 

차라리 후련히 빈 하늘,

또 무엇이 동정(同情)을 하려 드는가.

간사해라 갈매기.

 

얼룩이 진다 바다.

수심(水深)을 두고 얼굴에 얼룩이 진다.

그래도 던지는 돌팔매의 항변(抗辯)은

한낱 꼴사나운 몸부림이냐.

 

이율의 항변, 시작사, 1954

 

 


 

 

고원 시인 / 물길

 

 

항상 목이 말라서

찬물 좀 달라, 많이 달라 하시더니

물을 더듬다가 온몸이 젖어

그대로 영영 가신 어머니.

 

모실 수 있는 길이 남아 있다면

물길 밖에 없었나 봅니다.

양손잡이 쇠지팽이 힘을 풀고

몸이 없는 물, 정수에 합쳐

훨훨 나가시는 걸음걸음

백팔번뇌 씻으시게

제 욕심을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 봄날 부슬비가 내리데요.

뉴욕의 아침 `흰돌다리' 그윽한 아래

핫슨 강물이 맑기도 하데요.

제단이 된 반석 속으로

염불 소리 방울 소리 스며들자

강물이 찰랑찰랑 새길을 열데요.

 

한줌 한줌 백골 가루가

독경의 물결에 백골 가루가

뜨는 듯 도는 듯 가라앉는 듯

어머니가 참 많아지고

하나가 되고,

외아들 가슴이 출렁거렸습니다.

 

핫슨 강에서 대서양으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어느날 어디쯤에서 쉬실까요.

 

물은 언제나 돈다지요.

돌아가시듯이 돌아오시겠지요.

좋아하시던 꽃 속에 피실까요.

 

  아들이 하는 일 걱정하시던

  민주주의 되면 고향 산천

  충청도 산골, 양산강 통해서 오실까요.

  통일조국 기다리다 들어서실까요.

 

어머니, 오늘부터 어머니 몫까지

물을 많이 마시겠습니다.

화분에 열심히 물도 주지요.

비가 오면 맞겠습니다.

강에도 바다에도 자주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다녀오지 않고 다녀가는

강을 따라 흐르는 제 머리에

여전히 부슬부슬 비가 오네요.

어머니가 오시네요.

오시는가요

가시는가요.

 

  물길 사십구만 리

  오시는가요

  가시는가요.

 

물너울, 창작과비평사, 1985

 

 


 

고원(高遠.1925∼2008.1.20) 시인

본명 고성원(高性遠). 충북 영동 출생.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영국 런던대, 퀸메리대 수료. 중고등학교 교사, 통신사ㆍ신문사 기자 등에 종사하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국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한국시인협회 사무간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역임.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 역임. 1954년 시지(詩誌) [시작(詩作)]을 창간, 주재, 1955년까지 6집을 발간하여 1950년대 기단의 일각을 빛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민영, 장호와 더불어 3인 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에 <연착된 막차>를 발표한 이래 많은 시집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