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시인 / 강(江) 있는 마을
한굽이 맑은 강(江)은 들을 둘러 흘러가고 기나 긴 여름날은 한결도 고요하다 어디서 낮닭의 울음소리 귀살푸시 들려오고
마을은 우뜸 아래뜸 그림같이 놓여 있고 읍(邑)내로 가는 길은 꿈결처럼 내다 뵈는데 길에는 사람 한 사람 보이지도 않어라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김상옥 시인 / 그 문전(門前)
모처럼 지는 꽃 손에 받아 사방(四方)을 둘러 본다
지척엔 아무리 봐도 놓아 줄 손이 없어
그 문전(門前) 닿기도 전에 이 꽃잎 다 시들겠다.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김상옥 시인 / 깃을 떨어뜨린 새
새는 앉는 자리마다 깃을 떨어뜨린다. 나도 서울 와서 수없이 옮겨 앉고 또 수없이 짐을 꾸렸다. 산다는 일은 고작 짐이나 꾸리는 일, 그 동안 넝마로 넘긴 짐이 자그만치 다섯 가마니 남은 짐도 결국은 넝마뿐이다. 이번에 옮겨 갈 곳은 또 어느 길목, 어느 등성인가? 문득 머무는 한 생각― 이윽고 더는 못 옮길 땅거미 깔린 이승의 끝, 내 이미 깃을 떨어뜨린 새 이 새는 스스로 짐 되어 마지막 짐짝모양 실려 가리니 그때는 돌아볼 이승도 다시 꾸릴 짐도 없을라.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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