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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상옥 시인 / 강(江) 있는 마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0.

김상옥 시인 / 강(江) 있는 마을

 

 

한굽이 맑은 강(江)은 들을 둘러 흘러가고

기나 긴 여름날은 한결도 고요하다

어디서 낮닭의 울음소리 귀살푸시 들려오고

 

마을은 우뜸 아래뜸 그림같이 놓여 있고

읍(邑)내로 가는 길은 꿈결처럼 내다 뵈는데

길에는 사람 한 사람 보이지도 않어라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김상옥 시인 / 그 문전(門前)

 

 

모처럼

지는 꽃 손에 받아

사방(四方)을 둘러 본다

 

지척엔

아무리 봐도

놓아 줄 손이 없어

 

그 문전(門前)

닿기도 전에

이 꽃잎 다 시들겠다.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김상옥 시인 / 깃을 떨어뜨린 새

 

 

새는 앉는 자리마다

깃을 떨어뜨린다.

나도 서울 와서

수없이 옮겨 앉고

또 수없이 짐을 꾸렸다.

산다는 일은 고작

짐이나 꾸리는 일,

그 동안 넝마로 넘긴 짐이

자그만치 다섯 가마니

남은 짐도 결국은 넝마뿐이다.

이번에 옮겨 갈 곳은

또 어느 길목, 어느 등성인가?

문득 머무는 한 생각―

이윽고 더는 못 옮길

땅거미 깔린 이승의 끝,

내 이미 깃을 떨어뜨린 새

이 새는 스스로 짐 되어

마지막 짐짝모양 실려 가리니

그때는 돌아볼 이승도

다시 꾸릴 짐도 없을라.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金相沃 1920년-2004년) 시인

시조 시인. 서예가. 서화가. 수필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출생. 아호(雅號)는 초정(草汀), 초정(艸丁), 초정(草丁).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중퇴. 1938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 1956년부터 마산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 1967년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1980년 제1회 노산문학상. 1989년 제시문화상. 1989년 제시조대상. 1995년 보관문화훈장.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1949》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