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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0.

 서정주 시인 /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소년왕 단종의 마지막 모습

 

 

강원도 영월에 온 17세 소년왕 단종은

피리 소리와

소쩍새 소리를 유난히 좋아해

시를 짓고 지내다가,

마지막 날은 흰 말을 타고

동쪽 산골짜기로 오르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옵니까?'

이곳 촌사람이 물으니

`샛별 속으로 놀러 갑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엔

그의 숙부 세조의 뜻대로

가느다란 활줄에 목이 졸려

아주 이쁘게 죽어 있었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육신모복상왕」조. 「단종상승」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서정주 시인 / 소자 이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

원제 : 소자(小者) 이(李)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

 

 

소자(小者) 이(李)생원네 무우밭은요, 질마재 마을에서도 제일로 무성하고 밑둥거리가 굵다고 소문이 났었는데요. 그건 이 소자(小者) 이(李)생원네 집 식구들 가운데서도 이 집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이 아주 센 때문이라고 모두들 말했습니다.

 

옛날에 신라 적에 지도로대왕(智度路大王)은 연장이 너무 커서 짝이 없다가 겨울 늙은 나무 밑에 장고만한 똥을 눈 색시를 만나서 같이 살았는데, 여기 이 마누라님의 오줌 속에도 장고만큼 무우밭까지 고무시키는 무슨 그런 신바람도 있었는지 모르지. 마을의 아이들이 길을 빨리 가려고 이 댁 무우밭을 밟아 질러가다가 이 댁 마누라님한테 들키는 때는 그 오줌의 힘이 얼마나 센가를 아이들도 할 수 없이 알게 되었습니다. ―`네 이놈 게 있거라. 저놈을 사타구니에 집어넣고 더운 오줌을 대가리에다 몽땅 깔기어놀라!' 그러면 아이들은 꿩새끼들같이 풍기어 달아나면서 그 오줌의 힘이 얼마나 더울까를 똑똑히 잘 알 밖에 없었습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술통촌 마을의 경사

 

 

고구려 산상왕이 하늘에다 제사할 때 쓰려고 가두어 둔 돼지 한 마리가 도망쳐서, 술을 잘 만드는 술통촌이라는 마을로 들어갔사온데요. 산에 철쭉꽃 나뭇가지 구부러져 오고가듯, 그놈의 돼지가 어찌나 되게는 왔다갔다하는지 잡히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나이 스무 살쯤 되었을까 후녀라는 이름의 토실토실한 과년한 처녀가 나와 아주 썩 든든히 이쁘게는 웃으면서 보기 좋게 이것의 뒷다리를 잡아 냉큼 붙들어 매 놓았습지요.

 

산상왕이 뒤에 이 이야기에 반해서 밤에 그네 집에 스며들어가 붙어 애기를 만들었다 하는데, 이것은, 참, 한 번 찬성해 볼 일이옵지요. 더더구나 요로코롬 해 만든 애기가 뒤에 커서 제법 왕까지도 됐다니, 이거야말로 술통촌 마을 뒷산의 철쭉꽃 나무가 그 구불구불한 가지 위에다 피우고 있는 꽃만큼이나 재미나긴 꽤나 재미난 이야깁지요.

 

    ―『삼국사기』 제16권, 고구려본기 4, 「산상왕 12년」조 참고.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서정주 시인 / 시론(詩論)

 

 

바닷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시(詩)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서정주 시인 / 신라유가의 제일문사 강수선생 소전

원제 : 신라유가(儒家)의 제일문사(第一文士) 강수선생(强首先生) 소전(小傳)

 

 

깡수는 찌끄만 귀족집 청년이지만

마음이사 귀족인 것보다 행결 더 힘이 세어

애인일랑 쌍놈의 철공장집 딸을 골라

남몰래 풀섶에서 야합하고 지내다가

남들의 손가락질 본체만체하구서

조강지처로 맞아들였던 자로,

글도 또한 그만큼한 힘이 있어서

그가 글을 쓰고 있으면 그 압력으로

일월(日月) 같은 이쁜 혹이 하나

하늘가에 꼼짝없이 새로 돋아날 만도 했더라.

우리 문무대왕께서도 칭찬하셨듯이,

대국 당나라의 황제폐하도

깡수의 편지만은 거절하지를 못했더라.

그가 죽은 뒤에 마누라만 남았을 때

왕은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그네는 쌀 한 톨도 받지를 않고

그 힘센 가난 속으로 그저 물러섰다는 바,

이 역시나 깡수 문장의 여력인가 하노매라.

 

    ―『삼국사기』, 「열전」 6.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