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 시인 / 그 날
그 날 네가 하아얗게 진찰대 위에 누워 있을 때 나는 네 비인 방에서 하아얗게 종이를 더듬고 있었더란다.
그 날 네가 새까만 드레스로 내 창문을 두들겼을 때 나는 새까만 정거장에서 차표를 끊고 있었더란다.
이러한 우연이 내가 너와 헤어지는 인사가 되었기에 두고 온 항구는 정녕 나를 못내 그리워하나 부다.
너 불이 밝아서 저무는 항구, 저무는 마음에 불 밝은 너. 나는 다시 원거리(遠距離)의 척도(尺度)로 차근차근 무엇을 수속해야 하는 것인가.
내일 아침일지도 모르는 또 몇 해 후 어느 날이라도 무방한, 그것은
그런 때라야 너는 올 게다. 벌써 내가 멀리 뱃전에서 호주머니 속에 이번엔 필연을 거머쥐고 가물가물 하늘만 웃고 섰을 그 날이라야 너는 올 게다.
거리(距離)가 나를 떼 두고 그리워하는 시절. 수속이 나를 배신하는 밤.
이율의 항변, 시작사, 1954
고원 시인 / 기적(汽笛)
간 곳을 알리지 않은 손이 고운 부인이 어린것 이마에 운명이라고 말하는 결심을 비빌 때에도 기적은 저렇게 하늘을 찔렀다.
엉뚱한 빛깔들이 필시 서로의 색소(色素)를 서로 바래 버리는 날 젊은 화가가 캔버스를 찢어 날리며 빗발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때에도 저렇게 기적은 하늘을 흔들었다.
핑계도 없이 찾아 나선 여기 역두(驛頭)에 시민증이 안 보이는 두 무데기 시체와 분실된 여권 옆에서 오늘따라 기적은 어쩌자고 청승맞게 가 버린 것과 나와의 짙은 교섭을 강요하는가.
나를 모르냐는 친구라는 사람의 무거운 소리가 어깨를 누르면, 정녕 밤하늘 부엉새의 애상은 아닌 기적이 소리소리 사람을 쫓는구나. 또 하나 소름겨운 무안을 주는구나.
쫓기는 발치에 걸리는 것.― 기적은 사뭇 어둠을 끌며 번져 가고 노래를 찢어 버린 내 민망한 손바닥은 무너진 벽돌의 증언(證言) 위에 선뜻 얹혔다.
이율의 항변, 시작사, 1954
고원 시인 / 김포의 표정
서울 서울 서럽도록 그립더니 지금 다시 변두리에 서서 서운해서 울먹이는 나그네 서울.
암만해도 몰라 볼 김포의 표정은 서먹서먹하고, 사반 세기 그림자가 어렵게 와서 어렵게 간다.
들어올 때도 떠나갈 때도 국적을 묻지 말라, 김포야. 부디 그렇게 여권과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지 좀 말아 달라.
못 찾을 산소에 가서 묻혀 온 흙이 들어 있는 짐을 들고 땅과 하늘 사이 오르는지 내리는지 어수선하게 나그네 서운한 서울 하늘, 먼 하늘.
나그네 젖은 눈, 혜원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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