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고원 시인 / 그 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9.

고원 시인 / 그 날

 

 

그 날 네가 하아얗게 진찰대 위에 누워 있을 때

나는 네 비인 방에서 하아얗게 종이를 더듬고 있었더란다.

 

그 날 네가 새까만 드레스로 내 창문을 두들겼을 때

나는 새까만 정거장에서 차표를 끊고 있었더란다.

 

이러한 우연이

내가 너와 헤어지는 인사가 되었기에

두고 온 항구는 정녕 나를 못내 그리워하나 부다.

 

너 불이 밝아서 저무는 항구,

저무는 마음에 불 밝은 너.

나는 다시 원거리(遠距離)의 척도(尺度)로

차근차근 무엇을 수속해야 하는 것인가.

 

내일 아침일지도 모르는

또 몇 해 후 어느 날이라도 무방한,

그것은

 

그런 때라야 너는 올 게다.

벌써 내가 멀리 뱃전에서 호주머니 속에

이번엔 필연을 거머쥐고

가물가물 하늘만 웃고 섰을 그 날이라야 너는 올 게다.

 

거리(距離)가 나를 떼 두고 그리워하는 시절.

수속이 나를 배신하는 밤.

 

이율의 항변, 시작사, 1954

 

 


 

 

고원 시인 / 기적(汽笛)

 

 

간 곳을 알리지 않은

손이 고운 부인이 어린것 이마에

운명이라고 말하는 결심을 비빌 때에도

기적은 저렇게 하늘을 찔렀다.

 

엉뚱한 빛깔들이

필시 서로의 색소(色素)를 서로 바래 버리는 날

젊은 화가가 캔버스를 찢어 날리며

빗발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때에도

저렇게 기적은 하늘을 흔들었다.

 

핑계도 없이 찾아 나선 여기 역두(驛頭)에

시민증이 안 보이는 두 무데기 시체와

분실된 여권 옆에서

오늘따라 기적은 어쩌자고 청승맞게

가 버린 것과 나와의

짙은 교섭을 강요하는가.

 

나를 모르냐는 친구라는 사람의

무거운 소리가 어깨를 누르면,

정녕 밤하늘 부엉새의 애상은 아닌

기적이 소리소리 사람을 쫓는구나.

또 하나 소름겨운 무안을 주는구나.

 

쫓기는 발치에 걸리는 것.―

기적은 사뭇 어둠을 끌며 번져 가고

노래를 찢어 버린 내 민망한 손바닥은

무너진 벽돌의 증언(證言) 위에 선뜻 얹혔다.

 

이율의 항변, 시작사, 1954

 

 


 

 

고원 시인 / 김포의 표정

 

 

서울 서울

서럽도록 그립더니

지금 다시 변두리에 서서

서운해서 울먹이는 나그네 서울.

 

암만해도 몰라 볼

김포의 표정은 서먹서먹하고,

사반 세기 그림자가

어렵게 와서

어렵게 간다.

 

들어올 때도 떠나갈 때도

국적을 묻지 말라, 김포야.

부디 그렇게

여권과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지 좀 말아 달라.

 

못 찾을 산소에 가서 묻혀 온

흙이 들어 있는 짐을 들고

땅과 하늘 사이

오르는지 내리는지 어수선하게

나그네 서운한

서울 하늘, 먼 하늘.

 

나그네 젖은 눈, 혜원출판사, 1989

 

 


 

고원(高遠.1925∼2008.1.20) 시인

본명 고성원(高性遠). 충북 영동 출생. 혜화전문(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영국 런던대, 퀸메리대 수료. 중고등학교 교사, 통신사ㆍ신문사 기자 등에 종사하고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국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한국시인협회 사무간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역임.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 역임. 1954년 시지(詩誌) [시작(詩作)]을 창간, 주재, 1955년까지 6집을 발간하여 1950년대 기단의 일각을 빛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민영, 장호와 더불어 3인 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에 <연착된 막차>를 발표한 이래 많은 시집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