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순 시인 / 환상(幻像) 부제: 서울 명동(明洞) 모나리자 다방(茶房)에서 송숙군(宋琡君)의 추억하는 애화(哀話)를 듣고
분명(分明)코 글라디올라스이었는데 글라디올라스는 홀연(忽然) 간 곳 없고 오마!
언니! 언니!
어느듯 십년(十年)의 세월(歲月)이 흘러간 그윽하고 향기(香氣)로운 죽은 언니의 완연(宛然)한 그 모습 어인 일고― 오마! 글라디올라스! 글라디올라스!
눈을 닦고 다시 본 다음 순간(瞬間) ― 본연(本然)의 풍광(風光)!
미(美)의 화신(化身)인양 그림도 잘 하고 또 도취(陶醉)하던 우리 언니! 언니가 세상(世上)을 떠나던 바로 직전(直前) 꽃 피는 이팔(二八) 소녀시절(少女時節)의 나 메어질 듯 두근거리는 벅찬 가슴 어루만지며 금방 활짝 펴난 싱싱하고 향기(香氣) 풍기는 핏빛인양 새빨간 글라디올라스 한 가지 조심 조심 손에 들고―
오랜 동안 병(病)들어 누워 있는 병실(病室) 문을 정숙(靜肅)히 밀고 들어서며 약(弱)한 신경(神經) 놀랄세라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순간(瞬間)
그윽히 다가오는 엄(嚴)한 죽엄의 발자욱 소리에 귀를 기울인 듯 쌀쌀한 흰 침대(寢臺) 위에 주검같이 고요히 누운 채 창백(蒼白)히 여윈 고운 얼굴에 차차로 물들어 올라 홍조(紅潮) 띠우며 글라디올라스와 나 번갈아 응시(凝視)하며 갖난애기의 첫웃음과도 같은 알 수 없는그윽한 그러나 교교(交交)한 만감(萬感)이 미소(微笑) 띠우다가 어느덧 죽엄의 그늘 어린 울음과도 같은 표정(表情)으로 변(變)하며
늦여름 밤 풀잎에 맺힌 진주(眞珠)알 같은 흰 이슬 방울 달빛 먹음고 구을러 떨어지는 듯 힘없이 빛나는 검푸른 눈에 맺힌 난데없는 하얀 눈물 방울 어느덧 홍조(紅潮) 띠운 여윈 뺨을 구을러 희 벼개 위에 떨어지던 그 모습! 그 얼굴! 그 표정(表情)! 오― 그 표정(表情)!
그때와도 같은 중복(中伏) 허리 찌는 듯이 무더운 칠월(七月) 하늘 오후(午後)의 한나절 지금 이 순간(瞬間)―- 정적(靜寂)한 나의 서재(書齋) 책상(冊床) 위에 아담(雅淡)한 이조백자(李朝白磁) 흰 화병(花甁)에 고이 핀 한 떨기 새빨간 글라디올라스 위에 그 속에 그 밖에 바로 그때 그 모습! 그 얼굴! 그 표정(表情)! 오오, 그 표정(表情)! 꿈인 듯 기적(奇蹟)인양 어린고요!
갑자기 패연(沛然)히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에 서재(書齋) 창문(窓門) 활짝 열어 제치니 비에 젖은 일진(一陣) 양풍(凉風)은 글라디올라스 빛갈과도 같이 알 수 없는 꿈과 놀라움과 안타까움과 흥분(興奮)에 홍조(紅潮) 띠운 나의 얼굴을 스쳐가노메라.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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