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순 시인 / 타는 가슴
쥐어 뜯어도 시원치 못한 이내 가슴
애매한 권연초에 불을 붙인다 피울 줄도 모르면서
나는 가슴속 무겁게 잠긴 애수, 억울, 고뇌 뿌연 안갯가루 묻혀 내어다 허공중에 뿌려 다오 씻어 내 다오
나의 입 속에 빨려 들어오는 연기야 나와 함께 사라져 다오
유수(柔綏)히 말려 올라가는 가늘고 고운 은자색(銀紫色)의 연기야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 질서없이 엉긴 피 묻은 마음의 실 뭉텅이 금새 스러져버릴 너의 고운 운명의 실끝에 가만히 이여다가 풀어 다오 허공중에 흔적도 없이
담배는 다 탔다 나의 가슴은 여전하다 또 하나 또 하나 연달아 붙여문다 그러나 연기만 사라지고 나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진다 아 불 불 나의 가슴에 불을 질러라 불을 질러라.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시인 / 폐허(廢墟)의 제단(祭壇)
해는 넘어가다 폐허(廢墟)위에 무심(無心)히도 해는 넘어가다.
호흡(呼吸)이 거칠고 혈맥(血脈)이 뛰노는 순난(殉難)의 아픔 같이 받는 흰옷의 무리들…… 입을 닫고 눈을 감고 폐허제단(廢墟祭壇) 밑에 엎드려 심장(心臟) 울리는 세계(世界)가 무너져 버릴 듯한 그 신음(呻吟)을 들으라
넘어가는 햇빛을 맞아 폐허(廢墟)의 허공(虛空)을 꿰뚫어 짝없이 홀로 서 있는 차디찬 옛 영광(榮光)의 궁전(宮殿)의 돌기둥 하나! 그를 두 팔로 끼어 안고 술을 끊고 눈 감는 자(者)여! 마른 덩굴 이끼에 서린 폐허(廢墟)의 옛성(城)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소리도 마음대로 내지 못하고 느껴 우는 흰옷의 무리여! 당홍색(唐紅色) 저고리 입은 어린이여
터질 듯이 살진 손목 이끌고 구름에 잠겨 있는 폐허(廢墟)의 제단(祭壇) 향(向)하는 짚신 신은 늙은 할아버지의 땅 위로 내리 깐 양미간(兩眉間)! 황혼(黃昏)빛에 서리는 그의 이마 위의 칼자국 같은 주름살!
폐허(廢墟)의 제단(祭壇)에 엎드려 애소(哀訴)하는 남아(男兒)들의 등 위에는 땀이 용솟음치고 머리에는 타는 듯한 김의 연기(煙氣) 서리도다.
폐허(廢墟)의 제단(祭壇)에 길이 넘는 검은 머리 풀고 맨발로 소복(素服) 입은 처녀(處女)들의 목단향(木檀香)과 기름등불은 주검같이 소리없는 폐허(廢墟)의 하늘 바람 한점 아니 이는데 꽂도 밑도 없는 깊은 밤 `어둠속'에 아프게도 우울(憂鬱)하고 단조(單調)하고도 끊임없는 곡선(曲線)의 가는 흰 `길'을 찾아 허공(虛空)에 헤매이다 헤매이다! 꿈나라의 한숨같이 그윽히도 가는 향(香)의 곡선(曲線)은 헤매이다 헤매이다.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목월 시인 / 침상(枕上) 외 3편 (0) | 2020.02.16 |
---|---|
서정주 시인 / 꽃 외 5편 (0) | 2020.02.15 |
박목월 시인 / 자수정(紫水晶) 환상 외 4편 (0) | 2020.02.15 |
서정주 시인 / 고려(高麗) 호일(好日) 외 5편 (0) | 2020.02.14 |
오상순 시인 / 어둠을 치는 자(者) 외 1편 (0) | 2020.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