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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상순 시인 / 단합(團合)의 결실(結實)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7.

오상순 시인 / 단합(團合)의 결실(結實)

 

 

풀끝에 맺힌

한 방울 이슬에

해와 달이 깃들고

 

끊임없는

낙수물 한 방울이

주춧돌을 패여 구멍을 뚫고

 

한 방울의 물이

샘이 되고

샘이 흘러

시내를 이루고

 

시냇물이 합쳐

바다를 이루나니

 

오― 한 방울 물의

신비(神秘)한 조화(調和)여

무한(無限)한 매력(魅力)

단합(團合)의 위력(威力)이여

 

우주(宇宙) 영원(永遠)한 흐름이

크낙한 너 발자취로 하여

더욱 난만(爛漫)한 진리(眞理)의 꽃은

피는 것인가.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시인 / 대추나무

 

 

적멸(寂滅)인 양

태고정적(太古靜寂)이 깃들인

원(院) 앞뜰 마당 한복판에

창공(蒼空)을 꿰뚫고 우뚝 솟아 있는

무성(茂盛)한 대추나무 한 그루

 

번창(繁昌)한 가지마다

자연(自然)의 염주(念珠)인 양

주렁주렁 맺힌

푸른 대추 알맹이들……

 

날마다 깊어만 가는

가을 바람 속에

피빛처럼 붉게 물들어 익어가나니……

 

대추 알들은 자연(自然)의 정액(精液)의 결정(結晶)

가을을 빚어내는 혈액(血液)의 핵(核)

 

뭇 결실(結實)을 익히고야 말리라는 듯이

숭엄(崇嚴)하게 쪼이는 한없이 그윽하고

거룩하고 다사롭고 따가운 가을 햇살의 빛나는 정열(情熱)과

속 모르게 신비(神秘)한 밤의 정기(精氣)와

드높은 가을밤 하늘에

진주(眞珠) 알인 양 총총드리 들어박혀

하늘을 잡아 흔들면

우수수 구을러 쏟아질 듯

수(數)없이 반짝이는 별들과의

활살자재(活殺自在)하고 조화무궁(造化無窮)한

가을 바람의 애무(愛撫)가 죽도록 그리웠어라

 

그러기에

사랑에 주리고 목말라

차츰 영글어 가는 귀뚜라미 소리 영롱(玲瓏)하고

달빛 머금은 이슬 방울 찬란(燦爛)한 가운데 가을 바람과 더불어

무슨 영겁(永劫)의 밀약(密約)이나 있는 듯

그 무슨 귓속이나 한 듯이

각각(刻刻)으로 깊어 가는 가을 바람속에

붉게 물들어 익어 가거니……

 

이 대추를 열매 맺으려

가을은 이 땅에 찾아 오고

이 열매는 가을을 위하여

그 빛이 짙어가는 것이어니……

 

그야말로 피빛으로 대추알들이

새빨갛게 무르익거들랑

그 육신(肉身)과 아울러

그 정신(精神)! 그 정념(精念)!

 

저 대추나무만이 아는

대자연(大自然)의 그 속모를

정(精)과 색(色)과

정(淨)과 동(動)과

진(眞)과 미(美)

비(秘)와 성(聖)을……

여지(餘地)없이

내 만끽(滿喫)하리 만끽(滿喫)하리.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오상순 [吳相淳, 1894.8.9 ~ 1963.6.3] 시인

1894년 서울에서 출생. 호는 공초(空超). .1906년 경신 학교(儆新學校) 졸업. 1918년 도시샤(同志社) 대학 종교철학과 졸업. 1920년 김억(金億), 남궁벽(南宮壁), 염상섭(廉想涉), 변영로(卞榮魯), 황석우(黃錫禹) 등과 함께 《폐허》의 동인으로 그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24년 보성 고등 보통 학교의 교사를 거쳐 1930년 불교 중앙 학림(동국 대학교의 전신) 교수 역임.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 1959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과 대통령상 등을 수상. 1963년 지병으로 사망. 주요작품으로 「한잔술」, 「첫날밤」, 「방랑의 마음」,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낙엽」 등이 다수 있음. 저서로는 死後 발간된  《오상순 시선》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