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목단여정(牧丹餘情)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선도산(仙桃山) 수정 그늘 어려 보랏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박목월 시인 / 무제(無題)
앉는 자리가 나의 자리다. 자갈밭이건 모래톱이건
저 바위에는 갈매기가 앉는다. 혹은 날고 끼룩거리고
어제는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며 사람을 그리워하고
오늘은 돌아가는 것을 생각한다. 바다에 뜬 구름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것은 앉는 자리가 그의 자리다.
벼랑 틈서리에서 풀씨가 움트고
낭떠러지에서도 나무가 뿌리를 편다.
세상의 모든 자리는 떠 버리면 흔적 없다. 풀꽃도 자취 없이 사라지고
저쪽에서는 파도가 바위를 덮쳐 갈매기는 하늘에 끼룩거리고
이편에서는 털고 일어서는 나의 흔적을 바람이 쓰담아 지워버린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박꽃
흰 옷자락 아슴아슴 사라지는 저녁답 썩은 초가지붕에 하얗게 일어서 가난한 살림살이 자근자근 속삭이며 박꽃 아가씨야 박꽃 아가씨야 짧은 저녁답을 말없이 울자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목월 시인 / 밥상 앞에서
나는 우리 신규(信奎)가 젤 예뻐. 아암, 문규(文奎)도 예쁘지. 밥 많이 먹는 애가 아버진 젤 예뻐. 낼은 아빠 돈 벌어가지고 이만큼 산물을 사 갖고 오마. 이만큼 벌린 팔에 한아름 비가 변한 눈 오는 공간(空間).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그것은 내일에 걱정할 일. 이만큼 벌린 팔에 한아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하늘. 아빠, 참말이지. 접때처럼 안 까먹지. 아암, 참말이지. 이만큼 선물을 사 갖고 온다는데. 이만큼 벌린 팔에 한아름 바람이 설레는 빈 공간(空間). 어린 것을 내가 키우나. 하느님께서 키워주시지. 가난한 자(者)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뜻을 내야 알지만. 상(床) 위의 찬(饌)은 순식물성. 숟갈은 한죽에 다 차는데 많이 먹는 애가 젤 예뻐. 언제부터 측은한 정(情)으로 인간은 얽매여 살아 왔던가. 이만큼 낼은 선물 사오께. 이만큼 벌린 팔을 들고 신(神)이어. 당신 앞에 육신(肉身)을 벗는 날, 내가 서리다.
청담(晴曇), 일조각, 1964
박목월 시인 / 방문(訪問)
백발이 되고, 이승을 하직할 무렵에 한번 더 만나보려니 소원했던 사람을 방문하게 되었다. 덧없이 흐른 세월이여. 끝없이 눈발이 내리는구나.
그를 방문했다.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그를 방문했다.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집에 있었다. 하얗게 마른 꽃대궁이. 그는 나를 영접했다. 손을 맞아 들이는 응접실에서.
그의 눈에는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이 어렸다. 나의 눈에도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
차가 나왔다. 손님으로서 조용히 드는 잔. 담담하고 향기로운 것이 팔분(八分)쯤 잔에 차 있다.
그를 방문했다.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하직했다. 하직 맙시다. 이것은 동양적인 하직의 인사.
청담(晴曇), 일조각,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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