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조국
누군가 한 그릇의 옛날 냉수를 조심조심 떠받들고 걸어오고 계시는 이.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받쳐 들고 오시는 이.
구름 머흐는 육자배기의 영원을, 세계의 가장 큰 고요 속을, 차라리 끼니도 아니 드시고 끊임없이 떠받들고 걸어오고만 계시는 이.
누군가. 이미 형상도 없는 하늘 속 텔레비로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밤낮으로 쉬임없이 받쳐 들고 오시는 이.
누군가 한 그릇의 옛날 냉수를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받쳐들고 오시는 이.
조국아. 네 그 모양 아니었더면 내 벌써 그 마지막 피리를 길가에 팽개치고 말았으리라.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진주 가서
백일홍 꽃망울만한 백일홍 꽃빛 구름이 하늘에 가 열려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1․4후퇴 때 나는 진주 가서 보았다.
암수의 느티나무가 오백년을 의(誼) 안 상하고 사는 것을 보았는가.
1․4후퇴 때 나는 진주 가서 보았다.
기생이 청강(淸江)의 신이 되어 정말로 살고 계시는 것을 보았는가.
1․4후퇴 때 나는 진주 가서 보았다.
그의 가진 것에다 살을 비비면 병이 낫는다고, 아직도 귀때기가 새파란 새댁이 논개의 강(江)물에다 두 손을 적시고 있는 것을 시인 설창수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어서 보았다.
신라초, 정음사, 1961
서정주 시인 / 찬술
밤 새워 긴 글 쓰다 지친 아침은 찬술로 목을 축여 겨우 이어 가나니 한 수에 오만 원짜리 회갑시 써 달라던 그 부잣집 마누라 새삼스레 그리워라. 그런 마누라 한 열대여섯 명 줄지어 왔으면 싶어라.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서정주 시인 / 추석
대춧물 들이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 떠나올 때 가슴에 끄리고 왔던 눈썹.
열두 자루 비수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비수들 다 녹슬어 시궁창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은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 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았다가 그 눈썹 꺼내 들고 기왓장 넘어오는고.
동천, 민중서관, 1968
서정주 시인 / 추일미음(秋日微吟)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규(蜀葵)는 붉은 물이 들었다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아내 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 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으면 좋을꼬.
신라초, 정음사,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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