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시인 / 불모(不毛)의 풀
늙은 서인(庶人) 두자미(杜子美), 징용으로 끌려온 그 변방(邊方)에도 풀은 철따라 푸르렀다.
고향 강남(江南)엔 담 넘어 꽃잎 날리고, 부황난 처자(妻子) 눈앞에 아른거렸나니
이룬 것 없이 나도 그만큼 찌들었는가 서울은 가을, 불모(不毛)의 풀만 무성하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비가(悲歌)
아파트 꼭대기에도 자욱한 귀뚜라미 소리, 이미 잃어버린 밤을 올올이 자아 올린다.
알것다 알것다 그만하면 알것다.
남루한 영혼들 짜고 매운 양념으로 푸성귀 발기듯 그 살갗 치대고 있다.
알것다 알것다 그만하면 알것다.
깎아지른 벼랑 밑 강들은 숨을 죽이고, 홑이불 같은 달빛 강물 위에 깔려 있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비 듣는 분막(墳幕)
등성이 넘어 넘어 골도 차츰 아늑한데 무덤은 도란도란 한 뜸으로 둘러 있고 비 듣는 안개 속으로 벌레 소리 자욱하다.
여기 다른 하늘 낮과 밤이 흘러가고 금잔디 다 젖어도 버설거지 하지 않고 외로운 넋들이 모여 의초롭게 살더란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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