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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상옥 시인 / 불모(不毛)의 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5.

김상옥 시인 / 불모(不毛)의 풀

 

 

늙은 서인(庶人) 두자미(杜子美),

징용으로 끌려온

그 변방(邊方)에도

풀은 철따라 푸르렀다.

 

고향 강남(江南)엔

담 넘어 꽃잎 날리고,

부황난 처자(妻子)

눈앞에 아른거렸나니

 

이룬 것 없이 나도

그만큼 찌들었는가

서울은 가을,

불모(不毛)의 풀만 무성하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비가(悲歌)

 

 

아파트 꼭대기에도

자욱한 귀뚜라미 소리,

이미 잃어버린 밤을

올올이 자아 올린다.

 

알것다 알것다

그만하면 알것다.

 

남루한 영혼들

짜고 매운 양념으로

푸성귀 발기듯

그 살갗 치대고 있다.

 

알것다 알것다

그만하면 알것다.

 

깎아지른 벼랑 밑

강들은 숨을 죽이고,

홑이불 같은 달빛

강물 위에 깔려 있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비 듣는 분막(墳幕)

 

 

등성이 넘어 넘어 골도 차츰 아늑한데

무덤은 도란도란 한 뜸으로 둘러 있고

비 듣는 안개 속으로 벌레 소리 자욱하다.

 

여기 다른 하늘 낮과 밤이 흘러가고

금잔디 다 젖어도 버설거지 하지 않고

외로운 넋들이 모여 의초롭게 살더란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김상옥(金相沃 1920년-2004년) 시인

시조 시인. 서예가. 서화가. 수필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출생. 아호(雅號)는 초정(草汀), 초정(艸丁), 초정(草丁).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중퇴. 1938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 1956년부터 마산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 1967년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1980년 제1회 노산문학상. 1989년 제시문화상. 1989년 제시조대상. 1995년 보관문화훈장.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1949》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