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춘궁(春窮)
보름을 굶은 아이가 산 한 개로 낯을 가리고 바위에 앉아서 너무 높은 나무의 꽃을 밥상을 받은 듯 보고 웃으면,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 두 개로 낯을 가리고 그 소식을 구름 끝 바람에서 겸상한 양 듣고 웃고,
또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 세 개로 낯을 가리고 그 소식의 소식을 알아들었는가 인제는 다 먹고 난 아이처럼 부시시 일어서 가며 피식 웃는다.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침향(沈香)
침향(沈香)을 만들려는 이들은, 산골 물이 바다를 만나러 흘러내려가다가 바로 따악 그 바닷물과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잠궈 넣어둡니다. 침향은, 물론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 잠근 참나무 토막들을 다시 건져 말려서 빠개어 쓰는 겁니다만, 아무리 짧아도 2~3백년은 수저(水底)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라야 향내가 제대로 나기 비롯한다 합니다. 천년쯤씩 잠긴 것은 냄새가 더 좋굽시요.
그러니, 질마재 사람들이 침향을 만들려고 참나무 토막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 내다가 육수와 조류가 합수(合水)치는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나 자기들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들이 건져서 쓰려는 게 아니고, 훨씬 더 먼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후대들을 위해섭니다.
그래서 이것을 넣는 이와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수백 수천 년은 이 침향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 따뿐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습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때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한때를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킬리만자로의 세 산봉우리는 무엇을 이심전심 합의하는 것일까?
기린의 키만큼 한 `새벽나무' 옆 그 잎을 뜯어먹다 또 사랑 기억하는 가시버시 기린의 입맞춤을 보인다. 고요하디 고요한 입맞춤을 보인다.
* 이 세계에서 네팔의 에베레스트 다음으로 높은 영산(靈山) 킬리만자로는 7천 몇백 미터나 되는, 봉우리는 언제나 흰 눈에 덮여 있는 산. 나그네들은 흔히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이 산이 잘 보이는 암보셀리까지 가서 거기에서 하룻밤 천막 신세를 지며 아침의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때를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아, 참, 이 킬리만자로산을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주봉(主峰)의 왼쪽으로 한참을 내려와서 주봉보다 작은 봉우리가 하나 보이고, 거기서 또 한참을 내려온 곳에 더 작은 또 하나의 봉우리가 보인다. 이 세 개의 산봉우리를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 삼대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고 느끼고 있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태국 코끼리
태국 코끼리는 절을 잘 합니다. 즈이 엄마 아빠에게는 물론, 즈이 새끼들한테도 아주 썩 잘 절을 합니다. 친한 중생들에겐 물론, 안 친한 중생들에게도 언제나 절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엔 무엇에게나, 눈에 영 안 보이는 것한테도 매양 빈틈없이 절을 잘 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간과 공간의 원근 사이에서 그들은 비교적 무사한 독립을 누립니다.
* 태국 방콕의 메남강(江)가에서 굽신굽신 절을 잘 하는 코끼리를 보니, 몇 해 전인가 우리 해인사 백련암의 수도 노승 성철 스님이 `절을 잘 할 줄 알면 시(詩)에도 좋을 것이다. 우선 한 삼천 번만 먼저 해보아라.' 말씀으로 내게 극진히 권해 주시던 게 생각이 났다. 원래 절을 잘 할 줄 모르던 나인지라, 이 태국 코끼리의 끊임없는 절과 이 태국의 무사했던 독립과 성철 스님의 말씀을 아울러 곰곰히 생각해 보노라니 그게 많이 그럴싸하게 느끼어졌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풀리는 한강가에서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잎풀 같은 것들 또 한 번 고개 숙여 보라 함인가
황토 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 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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