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서정주 시인 / 춘궁(春窮)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6.

 서정주 시인 / 춘궁(春窮)

 

 

보름을 굶은 아이가

산 한 개로 낯을 가리고

바위에 앉아서

너무 높은 나무의 꽃을

밥상을 받은 듯 보고 웃으면,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 두 개로 낯을 가리고

그 소식을

구름 끝 바람에서

겸상한 양 듣고 웃고,

 

또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 세 개로 낯을 가리고

그 소식의 소식을 알아들었는가

인제는 다 먹고 난 아이처럼

부시시 일어서 가며 피식 웃는다.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서정주 시인 / 침향(沈香)

 

 

침향(沈香)을 만들려는 이들은, 산골 물이 바다를 만나러 흘러내려가다가 바로 따악 그 바닷물과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잠궈 넣어둡니다. 침향은, 물론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 잠근 참나무 토막들을 다시 건져 말려서 빠개어 쓰는 겁니다만, 아무리 짧아도 2~3백년은 수저(水底)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라야 향내가 제대로 나기 비롯한다 합니다. 천년쯤씩 잠긴 것은 냄새가 더 좋굽시요.

 

그러니, 질마재 사람들이 침향을 만들려고 참나무 토막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 내다가 육수와 조류가 합수(合水)치는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나 자기들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들이 건져서 쓰려는 게 아니고, 훨씬 더 먼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후대들을 위해섭니다.

 

그래서 이것을 넣는 이와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수백 수천 년은 이 침향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 따뿐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습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서정주 시인 /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때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한때를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킬리만자로의 세 산봉우리는

무엇을 이심전심 합의하는 것일까?

 

기린의 키만큼 한 `새벽나무' 옆

그 잎을 뜯어먹다 또 사랑 기억하는

가시버시 기린의 입맞춤을 보인다.

고요하디 고요한 입맞춤을 보인다.

 

* 이 세계에서 네팔의 에베레스트 다음으로 높은 영산(靈山) 킬리만자로는 7천 몇백 미터나 되는, 봉우리는 언제나 흰 눈에 덮여 있는 산. 나그네들은 흔히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이 산이 잘 보이는 암보셀리까지 가서 거기에서 하룻밤 천막 신세를 지며 아침의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때를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아, 참, 이 킬리만자로산을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주봉(主峰)의 왼쪽으로 한참을 내려와서 주봉보다 작은 봉우리가 하나 보이고, 거기서 또 한참을 내려온 곳에 더 작은 또 하나의 봉우리가 보인다. 이 세 개의 산봉우리를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 삼대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고 느끼고 있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태국 코끼리

 

 

태국 코끼리는 절을 잘 합니다.

즈이 엄마 아빠에게는 물론,

즈이 새끼들한테도 아주 썩 잘 절을 합니다.

친한 중생들에겐 물론,

안 친한 중생들에게도 언제나 절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엔 무엇에게나,

눈에 영 안 보이는 것한테도

매양 빈틈없이 절을 잘 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간과 공간의 원근 사이에서

그들은 비교적 무사한 독립을 누립니다.

 

* 태국 방콕의 메남강(江)가에서 굽신굽신 절을 잘 하는 코끼리를 보니, 몇 해 전인가 우리 해인사 백련암의 수도 노승 성철 스님이 `절을 잘 할 줄 알면 시(詩)에도 좋을 것이다. 우선 한 삼천 번만 먼저 해보아라.' 말씀으로 내게 극진히 권해 주시던 게 생각이 났다. 원래 절을 잘 할 줄 모르던 나인지라, 이 태국 코끼리의 끊임없는 절과 이 태국의 무사했던 독립과 성철 스님의 말씀을 아울러 곰곰히 생각해 보노라니 그게 많이 그럴싸하게 느끼어졌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정주 시인 / 풀리는 한강가에서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잎풀 같은 것들

또 한 번 고개 숙여 보라 함인가

 

황토 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 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서정주[徐廷柱,1915.5.18 ~ 2000.12.24] 시인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 이후 『귀촉도(歸蜀途)』(1948), 『신라초(新羅抄)』(1961), 『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산시』(1991) 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 간행.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다수의 賞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