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시인 / 사향(思鄕)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깊섶으로 흘러가고, 백양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수해(樹海)
도끼에 닿기만 하면 선 채로 썩어지는 나무 한 번 보기만 해도 삽시에 연기로 갈앉는 나무 몇 백리(百里) 지름을 가진 그런 숲 속에 묻히고 있다.
숨을 거두는 향기 속에 멍석만한 꽃이 피고 먹으면 마취(痲醉)되는 아름드리 복숭아 열매 인종은 벌레만 못해, 발도 아예 못 붙인 이곳.
칠흑의 머리를 푼 수양버들이 달려오고 휘황한 등불이 매달린 계수나무도 달려와서 구천(九天)에 휘장을 두르고 세상 밖에 노닐고 있다.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김상옥 시인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으슷이 연좌(蓮座) 위에 발돋움하고 서서 속눈섭 조으는 듯 동해(東海)를 굽어 보고 그 무슨 연유(緣由) 깊은 일 하마 말씀하실까
몸짓만 사리어도 흔들리는 구슬소리 옷자락 겹친 속에 살결이 꾀비치고 도도록 내민 젖가슴 숨도 고이 쉬도다
해마다 봄날 밤에 두견(杜鵑)이 슬피 울고 허구헌 긴 세월(世月)이 덧없이 흐르건만 황홀한 꿈 속에 쌓여 홀로 미소(微笑)하시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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