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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상옥 시인 / 사향(思鄕)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6.

김상옥 시인 / 사향(思鄕)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깊섶으로 흘러가고,

백양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수해(樹海)

 

 

도끼에 닿기만 하면 선 채로 썩어지는 나무

한 번 보기만 해도 삽시에 연기로 갈앉는 나무

몇 백리(百里) 지름을 가진 그런 숲 속에 묻히고 있다.

 

숨을 거두는 향기 속에 멍석만한 꽃이 피고

먹으면 마취(痲醉)되는 아름드리 복숭아 열매

인종은 벌레만 못해, 발도 아예 못 붙인 이곳.

 

칠흑의 머리를 푼 수양버들이 달려오고

휘황한 등불이 매달린 계수나무도 달려와서

구천(九天)에 휘장을 두르고 세상 밖에 노닐고 있다.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김상옥 시인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으슷이 연좌(蓮座) 위에 발돋움하고 서서

속눈섭 조으는 듯 동해(東海)를 굽어 보고

그 무슨 연유(緣由) 깊은 일 하마 말씀하실까

 

몸짓만 사리어도 흔들리는 구슬소리

옷자락 겹친 속에 살결이 꾀비치고

도도록 내민 젖가슴 숨도 고이 쉬도다

 

해마다 봄날 밤에 두견(杜鵑)이 슬피 울고

허구헌 긴 세월(世月)이 덧없이 흐르건만

황홀한 꿈 속에 쌓여 홀로 미소(微笑)하시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김상옥(金相沃 1920년-2004년) 시인

시조 시인. 서예가. 서화가. 수필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출생. 아호(雅號)는 초정(草汀), 초정(艸丁), 초정(草丁).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중퇴. 1938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 1956년부터 마산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 1967년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1980년 제1회 노산문학상. 1989년 제시문화상. 1989년 제시조대상. 1995년 보관문화훈장.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1949》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