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시인 / 어느 가을
언제나 이맘때면 담장에 수(繡)를 놓던 담쟁이넝쿨. 병(病)든 잎새들 그 넝쿨에 매달린 채 대롱거린다.
가로(街路)의 으능나무들 헤프게 흩뿌리던 그 황금(黃金)의 파편(破片), 이 또한 옛날 얘기. 지금은 때묻은 남루조각으로 앙상한 가지마다 추레하게 걸렸다.
멸구에 찢긴 논두렁 허옇게 몸져 눕고, 사람 같은 사람은 벌레만도 못해 인젠 마음 놓고 한 번 울어 볼 수도 없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이순(耳順)의 봄
올봄은 이순(耳順)의 봄.
지난 날 지난 봄은
시정(市井) 잡배(輩)도, 산중 돌배꽃도,
제 얼굴 아니게 분(粉)칠했다.
올봄은 이순(耳順)의 봄.
더덕더덕 칠한 것 말짱 지우고,
몰라 본 주인(主人)도 찾아 뵈옵고,
피부색(色) 그대로 볕 발리 서리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인간(人間)나라 생불(生佛).. 원제 : 인간(人間)나라 생불(生佛)나라의 수도(首都)
신라(新羅) 일천년(一千年) 서라벌은 한 왕조(王朝) 아니라, 한 왕조(王朝)의 서울 아니라, 진실로 인간(人間)의 서울, 오직 인간(人間)나라의 서울이니라.
한 가닥 젓대의 울림으로 만(萬)이랑 사나운 물결도 잠재운 나라, 모란빛 진한 피비림도 새하얀 젖줄로 용솟음치운 나라, 첫새벽 홀어미의 사련(邪戀)도 여울물에 헹궈서 건네 준 나라, 그 나라에 또 소 몰던 백발(白髮)도, 행차(行次)에 나선 젊으나 젊은 남의 아내도, 서로 죄(罪) 없는 눈짓 마주쳤느니
꽃벼랑 드높은 언덕을 단숨에 뛰어올라, 기어올라, 천지(天地)는 보오얀 봄안개로 덮이던 생불(生佛)나라 생불(生佛)들의 수도(首都)이니라.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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