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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상옥 시인 / 어느 가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7.

김상옥 시인 / 어느 가을

 

 

언제나 이맘때면 담장에 수(繡)를 놓던 담쟁이넝쿨. 병(病)든 잎새들 그 넝쿨에 매달린 채 대롱거린다.

 

가로(街路)의 으능나무들 헤프게 흩뿌리던 그 황금(黃金)의 파편(破片), 이 또한 옛날 얘기. 지금은 때묻은 남루조각으로 앙상한 가지마다 추레하게 걸렸다.

 

멸구에 찢긴 논두렁 허옇게 몸져 눕고, 사람 같은 사람은 벌레만도 못해 인젠 마음 놓고 한 번 울어 볼 수도 없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이순(耳順)의 봄

 

 

올봄은

이순(耳順)의 봄.

 

지난 날

지난 봄은

 

시정(市井) 잡배(輩)도,

산중 돌배꽃도,

 

제 얼굴 아니게

분(粉)칠했다.

 

올봄은

이순(耳順)의 봄.

 

더덕더덕 칠한 것

말짱 지우고,

 

몰라 본 주인(主人)도

찾아 뵈옵고,

 

피부색(色) 그대로

볕 발리 서리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김상옥 시인 / 인간(人間)나라 생불(生佛)..

원제 : 인간(人間)나라 생불(生佛)나라의 수도(首都)

 

 

신라(新羅) 일천년(一千年) 서라벌은 한 왕조(王朝) 아니라, 한 왕조(王朝)의 서울 아니라, 진실로 인간(人間)의 서울, 오직 인간(人間)나라의 서울이니라.

 

한 가닥 젓대의 울림으로 만(萬)이랑 사나운 물결도 잠재운 나라, 모란빛 진한 피비림도 새하얀 젖줄로 용솟음치운 나라, 첫새벽 홀어미의 사련(邪戀)도 여울물에 헹궈서 건네 준 나라, 그 나라에 또 소 몰던 백발(白髮)도, 행차(行次)에 나선 젊으나 젊은 남의 아내도, 서로 죄(罪) 없는 눈짓 마주쳤느니

 

꽃벼랑 드높은 언덕을 단숨에 뛰어올라, 기어올라, 천지(天地)는 보오얀 봄안개로 덮이던 생불(生佛)나라 생불(生佛)들의 수도(首都)이니라.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김상옥(金相沃 1920년-2004년) 시인

시조 시인. 서예가. 서화가. 수필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출생. 아호(雅號)는 초정(草汀), 초정(艸丁), 초정(草丁).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중퇴. 1938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 1956년부터 마산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 1967년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1980년 제1회 노산문학상. 1989년 제시문화상. 1989년 제시조대상. 1995년 보관문화훈장.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1949》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