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 / 행진곡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멀리 서 있는 바닷물에선 난타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귀촉도, 정음사, 1948
서정주 시인 / 황룡사 큰 부처님상이 되기까지
부처님이거나, 보살이거나, 시(詩)거나, 또 무엇이거나, 영원히 놓아 두고 보고 싶은 예술품을 만들다가 신퉁찮으면 신퉁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넘겨 줘야지, 신퉁찮은 그대로 어리무던하게 만들고 있지 마라. 절대로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차라리 쇠붙이라든지 금이라든지 하는 그 재료들을 단단한 배에 실어 돛을 달아서 머언 먼 시간과 공간 위에 띄워 보내라. 그리하여 이 배는 여러 백 년 여러 천년을 이 땅 위의 온갖 나라를 표착(漂着)하여 돌면서, 마침내는 그 어디매 한 군데서 가장 적합한 창조의 예술가를 만나 비로소 그 아주 신퉁한 모습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신라 황룡사의 큰 부처님 조상(彫像)의 재료들이 인도에서 `만들다 잘 안되건 딴 데로 보내시오' 하는 쪽지와 함께 배에 실려 먼 바닷길을 떠나, 이 땅 위의 온갖 나라의 예술가를 찾아 헤매 돌다가, 일천하고도 삼백여 년이 지난 뒤에사 신라에 와 비로소 그 임자를 만나 창작되어 놓이듯이…….
―『삼국유사』 3, 「황룡사복」 6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서정주 시인 / 황진이
황진이가 화담 서경덕이 보고 `선생님하고 제가 그래도 개성 사람들 중엔 으뜸일 거예요. 선생 곁에서 벌써 여러 해를 때때로 무람없이 굴어먹었어도 선생은 저를 붙어먹진 않았으니깐. 그러고 우리 사이 또 하나 으뜸을 끼워 놓자면 저 시원히 늘 쏟아지는 박연폭포쯤이겠습죠?' 선언했다는 것은 단순한 한자리의 농담이었을까? 이건 아무래도 진담이었던 것만 같다. 금강산으로, 태백산으로, 지리산으로, 어디로, 어디로, 황진이가 우의(羽衣) 잃은 선녀처럼 떠돌아 다니다가 전라도 나주 부사의 잔치판에 끼어들었을 때, 시 읊고 거문고 타며 노래부르기에 앞서 방약무인하게도 너무나 한가하게 그 옷 속에서 이를 잡아내 죽이고 있었던 걸로 보면 늘 그만콤 했던 그 시적(詩的) 자존심으로 보아 화담한테 한 그 말은 역시나 진담이었던 것 같다.
―식소록(識小錄), 『연려실기술』 제9권, 중종조 「중종조유일」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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