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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황명 시인 / 각서(覺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7.

황명 시인 / 각서(覺書)

 

 

 

너의 파아란 눈으로 저 우람한 하늘을 우러르면 너는 금시 한 그루 관목(灌木). 어이없이 밀리는 강물의 저류(低流)에 너는  한 알의 모래로 있을지도 모른다. 저러히도 산이, 들이, 강이 말이 없는 것은 그 오래고도 숱한 내력들을 상기 정리하지 못한 채, 준천재(準天才)로 남아있기 때문. 진정 산다는 것 너와 나의 가슴에 응어리진 긴 시간에의 순례(巡禮).

 

 

아직은 산과 들을 잊지 못한다. 아직은 해안(海岸), 그런 지점을 그리지 않는다.  지금은 어느동구  앞을 굽이쳐 흐르고 있을 너의 모습에  아예 미소는 없어도 좋다.  말없는 대치(對峙)로 있어라 어느 날 너의 앞을 가로막던 그 암층(岩層)처럼 어쩔 수 없는 용해(溶解)의 시간까지는.

 

 

더러는 구름이거나 바위 같은 것. 더러는 꽃이거나, 풀잎 같은 것, 서로들 한아름씩 안고 가는길 위에 비가 내리면 눈도 오겠지. 그럴 때는 여인이여 그대 치마폭을 감싸쥐고, 신발은 신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그들의 뿌리를 가꿀 시간은 있어야지.

 

 Ⅳ

 

어쩌면 경이(驚異) 같은 감격이야 없는 것이 낫다. 빛나는 모든 것에의 불신(不信). 너는 등걸의 표피(表皮)를 따내면서 즐거운 낯빛을랑 감추어라. 이제 먼 고향에서 반가운 소식을 전할 사람도 없어졌다. 그 붉던 감나무도 지금은 까마귀 날갯죽지에  슬려 얼마만큼은 길도 났겠지. 그런 곳에서는 내 자손더러 그들이 살 집을 짓지 못하게 해야지.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고목송(古木頌)

 

 

파아란

하늘을 이고

천년(千年) 묵은 침묵이

구원(久遠)을 호흡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와도

의연(毅然)히 버티고 서 있는

무거운 자세.

 

철 따라

잎이야 지워도

그만큼

연륜(年輪)을 키워가는

몸뚱이며 가지는

빛을 받아 솟구쳐……

 

아슬히 내려앉는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음은

끝내

구원(救援)받을 사람에

여명(黎明)을 계시(啓示)하는 입상(立像).

 

아,

우리 모두

저렇게

내일의 보람일랑

굳이 참고 견디어 볼 일이다.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귀의(歸依)

 

 

그 창문(窓門)은 여름밤에도 굳게 닫혀 있었다

 

저렇게 모두

서로가 아우성치는 것은

 

오랜 날

―눈보라와 소낙비의 그런 계절을―

암말없이 참으며

 

스스로의

저바릴 수 없는 바라움과

한오리 믿음 속에서

 

무한량

묘연(杳然)한 그리움으로

내처 살아왔다는……

 

그 숨가쁜 소리가

지금 익어가는 이 밤따라

나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아예

정사(情死)야

화려한 낭만 같은 것

 

저렇게 모두

서로가 아우성치는 것은

 

기어이 한번은

밝은 빛을 살자는

무수한 나의

날짐승들의 목메인 소리.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黃命.1931.11.20∼1998.10.2) 시인

창녕군 영산면 출생. 본명 황복동. 1955년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195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분수>가 당선되었다. 휘문고교 교사, 1972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국민훈장석류장 수상. 2000년 3월 4일 시비(詩碑)가 경기 부천시 중앙공원에서 제막됐다. 문화훈장 석류장(1992), 자랑스러운 성남인상(1995), 보관문화훈장(1996) 등 수상. 1999  유고시집 <분수와 나목>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