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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상옥 시인 / 입동(立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8.

김상옥 시인 / 입동(立冬)

 

 

그대 바람같이 가 버리고 이내 이날로 소식(消息)도 없다

 

잎 진 가지 새로 머언 산(山)길이 트이고

새로 인 지붕들은 다소곤히 엎드리고

김장을 뽑은 밭이랑 검은 흙만 들났다

 

둘안을 깔린 낙엽(落葉) 아궁에 지피우고

현불에 지새우던 그날 밤을 생각느니

몹사리 그리운 시름 눈에 고여 흐린다

 

칩고 흐린 날을 뒷뫼엔 숲이 울고

까마귀 드날르고 해도 차츰 저무는데

헐벗고 떠나신 길에 주막(酒幕)이나 있는지……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김상옥 시인 / 주변(周邊)에서

 

 

그것은

한 가지 질문이었다,

두엄 곁에 핀 달개비꽃도.

 

그것은 또

한 가지 대답이었다,

풀잎을 기는 딱정벌레도.

 

참으로

뭉클한 슬픔이었다,

가까이 들리는 먼 귀울림.

 

문학사상, 1992

 

 


 

 

김상옥 시인 / 참파노의 노래

 

 

늙고 지친 참파노

인제는 곡예(曲藝)에도 손을 씻고

철겨운 눈을 맞으며

종로의 인파(人波) 속을 누비고 간다.

 

길은 찾으면 있으련만

봄이 오는 머언 남쪽 바닷가

내 전생(前生)의 젤소미나

너는 이날 거기서 뭘 하느냐?

 

내 그만 돌아갈까

우장(雨裝)모양 걸쳤던 코오트

그 체크무늬에도 봄은 오는가.

 

쑥국으며 햇상치쌈

울 밑에 돋아난 향긋한 방풍나물

그런 조촐한 저녁상 앞에

너와 함께 그날처럼 앉고 싶구나.

 

"참파노오 참파노오

참파노가 왔어요!"

 

흐린 날 외론 갈매기

목이 갈리던 그 울부짖음

뒤끝이 떨리던 나팔(喇叭)소리

지금도 쟁쟁 내 귓전에 울린다.

 

언제나 사무적(事務的)인 이승에선

눈만 껌벅인 젤소미나

내 역시 골이 비었어도

아직 추스릴 눈물만은 간직했다.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김상옥(金相沃 1920년-2004년) 시인

시조 시인. 서예가. 서화가. 수필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출생. 아호(雅號)는 초정(草汀), 초정(艸丁), 초정(草丁).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중퇴. 1938년에는 김용호, 함윤수 등과 함께 <맥> 동인으로 활동. 시조 《봉선화》를 《문장》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4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으로 등단. 1956년부터 마산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 1967년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1980년 제1회 노산문학상. 1989년 제시문화상. 1989년 제시조대상. 1995년 보관문화훈장. 시조집으로 《고원의 곡》, 시집으로 《이단의 시(1949》 《의상》, 동시집으로 《석류꽃》 《꽃속에 묻힌 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