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시인 / 추천
멀리 바라보면 사라질듯 다시 뵈고 휘날려 오가는 양 한 마리 호접(胡蝶)처럼 앞뒤 숲 푸른 버들엔 꾀꼬리도 울어라.
어룬 님 기다릴까 가비얍게 내려서서 포탄잠(簪) 빼어 물고 낭자 고쳐 찌른 담에 오지랖 다시 여미며 가쁜 숨을 쉬도다.
초적(草笛), 수향서헌, 1947
김상옥 시인 / 축제(祝祭)
살구나무 허리를 타고 살구나무 혼령이 나와 채선(彩扇)을 펼쳐 들고 신명나는 굿을 한다. 자줏빛 진분홍을 돌아 또 휘어잡는 연분홍!
봄은 누룩 딛고 술을 빚는 손이 있다. 헝클린 가지마다 게워 넘친 저 화사한 발효(醱酵) 천지(天地)를 뒤덮는 큰 잔치가 하마 가까워 오나부다.
향기 남은 가을, 상서각, 1989
김상옥 시인 / 태(胎)
벽장 안 낡은 손가방 그 속엔 으례 칫솔과 타올.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호로병(甁) 속에 있고,
겨울 숲 땅거미 깔려도 다 그 태(胎) 속의 고물거림…….
시와 시학, 1993
김상옥 시인 / 화창(和暢)한 날
우리 평생(平生)에 이런 날이 며칠이나 될까. 지금 강변로(江邊路)엔 꾀꼬리빛 수양버들, 머리 푼 세우(細雨)처럼 드리웠다. 흩뿌리는 시늉으로 천만사(千萬絲) 가지마다 연초록 휘장모양 드리워 있다.
휘장에 가리운 외인묘지(外人墓地). 저 호젓한 구릉(丘陵)에도 초록빛 사이사이, 흰 묘비(墓碑) 사이사이, 연교(連翹)꽃 노오랗게 어우러졌다. 브로크 담장 밖엔 살빛 분홍꽃도 조금씩 조금씩 초친 듯이 번져난다.
여기는 절두산(切頭山) 드높인 성당(聖堂), 낭떠러지 받쳐든 위태로운 난간(欄干)을 기대 선다. 삶과 죽음마저 남의 일처럼 굽어보기에 알맞은 곳. 살아 있는 외로움이 뼈에 사무친다.
묵(墨)을 갈다가, 창작과비평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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