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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황명 시인 / 내 어느 날엔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8.

황명 시인 / 내 어느 날엔

 

 

내 어느 날엔 영랑(永郞)처럼 그렇게

힘없고 느릿한 핏줄이 되리

허지만, 아직은 강변에 나부끼는 억새마냥

사나운 몸짓으로 있어라

철따라 잎 피고, 꽃 지듯

삼월은 오고, 사월은 가고

실비단 하늘엔 종달이야 뜨겠지만

지금쯤 목이 쉬어 버린 그 처녀는

어디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가씨, 아직은 당신을 만남이 웬지

쑥스럽고 두려운 까닭을 모르오.

혹시 오월이 와서 모란은 한창인데

저 유월의 홍수(洪水)가 생각키우기 때문일까

역사의 부표(浮標) 팔월이여, 안타깝게

들떴던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천천히 서풍이라도 몰고 왔으면

이젠 온통 원색(原色)의 조락(凋落)

멀리 하늘 아래

예사 한 잎 은행잎은 떠날은다.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눈오는 날에

 

 

한많은 시공(時空)을 스쳐 온

나의 모습을 본다

 

아직은 얼마쯤의 따뜻한

인간의 체온을 믿는다.

 

무도회 같은 여름날의

울창했던 나무의 기억

 

칠보색(七寶色) 꽃들은

스스로 역겨워 스러지고

 

그 위에 다시금 원시(原始)의

순수한 꽃잎은 피고

 

망각의 시간에서 그래도

잊히지 않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사뿐한 발걸음으로 만난다.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밤. 구도(構圖)

 

 

하강(下降)하는 저변(底邊)에서

모든 것은 잠시 제 자리에 있어라

쉰다는 것은 얼마나

넓은 평면인가.

 

흑백(黑白)의 균형을 위하여

먼 해변에서 바람은

그 숱한 채색의 풍경들을

조용히 부정(不定)하고,

 

어느 날의 그 소녀의 고독도 지금은

허허(虛虛)로운 공간(空間)에 펼쳐진

한 폭 드리운

휘장으로 정지하고,

 

다만, 강물이여

내면의 승화(昇華)를 위하여

무한의 원점(原點)에서

직선의 대칭으로

흘러라.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黃命.1931.11.20∼1998.10.2) 시인

창녕군 영산면 출생. 본명 황복동. 1955년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195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분수>가 당선되었다. 휘문고교 교사, 1972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국민훈장석류장 수상. 2000년 3월 4일 시비(詩碑)가 경기 부천시 중앙공원에서 제막됐다. 문화훈장 석류장(1992), 자랑스러운 성남인상(1995), 보관문화훈장(1996) 등 수상. 1999  유고시집 <분수와 나목>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