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시인 / 내 어느 날엔
내 어느 날엔 영랑(永郞)처럼 그렇게 힘없고 느릿한 핏줄이 되리 허지만, 아직은 강변에 나부끼는 억새마냥 사나운 몸짓으로 있어라 철따라 잎 피고, 꽃 지듯 삼월은 오고, 사월은 가고 실비단 하늘엔 종달이야 뜨겠지만 지금쯤 목이 쉬어 버린 그 처녀는 어디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가씨, 아직은 당신을 만남이 웬지 쑥스럽고 두려운 까닭을 모르오. 혹시 오월이 와서 모란은 한창인데 저 유월의 홍수(洪水)가 생각키우기 때문일까 역사의 부표(浮標) 팔월이여, 안타깝게 들떴던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천천히 서풍이라도 몰고 왔으면 이젠 온통 원색(原色)의 조락(凋落) 멀리 하늘 아래 예사 한 잎 은행잎은 떠날은다.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눈오는 날에
한많은 시공(時空)을 스쳐 온 나의 모습을 본다
아직은 얼마쯤의 따뜻한 인간의 체온을 믿는다.
무도회 같은 여름날의 울창했던 나무의 기억
칠보색(七寶色) 꽃들은 스스로 역겨워 스러지고
그 위에 다시금 원시(原始)의 순수한 꽃잎은 피고
망각의 시간에서 그래도 잊히지 않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사뿐한 발걸음으로 만난다.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밤. 구도(構圖)
하강(下降)하는 저변(底邊)에서 모든 것은 잠시 제 자리에 있어라 쉰다는 것은 얼마나 넓은 평면인가.
흑백(黑白)의 균형을 위하여 먼 해변에서 바람은 그 숱한 채색의 풍경들을 조용히 부정(不定)하고,
어느 날의 그 소녀의 고독도 지금은 허허(虛虛)로운 공간(空間)에 펼쳐진 한 폭 드리운 휘장으로 정지하고,
다만, 강물이여 내면의 승화(昇華)를 위하여 무한의 원점(原點)에서 직선의 대칭으로 흘러라.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명 시인 / 백두파(白頭波) 외 2편 (0) | 2020.02.29 |
---|---|
김상옥 시인 / 추천 외 3편 (0) | 2020.02.29 |
김상옥 시인 / 입동(立冬) 외 2편 (0) | 2020.02.28 |
서정주 시인 / 행진곡 외 2편 (0) | 2020.02.28 |
황명 시인 / 각서(覺書) 외 2편 (0) | 2020.02.27 |